◇ 시인과 시(현대)
송연숙 시인 / 눈 자르기
파스칼바이런
2022. 10. 14. 05:00
송연숙 시인 / 눈 자르기
눈目을 자른다 눈의 속살이 뽀얗다
한 덩어리 감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을 찾는다 눈은 씨앗이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손 그늘을 만들며 바깥 온도를 살피는 눈동자
눈에서 싹이 튼다 눈에서 꽃이 핀다 감자 싹이 파랗게 봄을 뚫고 올라오듯 감자꽃이 하얗게 여름을 뚫고 올라오듯 눈에서 사랑이 눈에서 증오가
눈에서 열매가 맺힌다 주먹 같은 흙덩이들이 가슴을 수 없이 친 후에 호미 끝에서 주렁주렁 딸려 올라오는 감자들 알감자 같은 새끼들
눈에서 태초가 시작되었다 처음 너를 바라보던 나의 눈에서 가부좌를 튼 채 밟히면서 여물어 가는 눈부처
모든 사랑, 모든 사람의 시작은 태초다 태초에 눈이 있었다 눈만 바로 뜬다면 땅 속 같은 어둠도 두렵지 않다
눈을 조각조각 자른다 사랑을, 증오를, 열병을, 부처를 봄을 자르고 태초를 잘라 내 검은 흙 위에 심는다 태초의 세상이 흑암 속에서 눈을 뜨며 일어날 것이다
월간 『모던포엠』 2022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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