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현형 시인 / 포옹의 방식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15. 05:00

권현형 시인 / 포옹의 방식

 

 

이윽고 뜨거움이 재가 될 때까지

그들 머리 위 자귀나무는 바람 불지 않는

저녁의 골목을 흔들 것이다

골목 주택가의 닫힌 철문 앞에서

닫힌 시간 안에서 남자와 여자가 껴안고 서 있다

 

사이를 떼어놓을 수 없는 부동의 석고상처럼 보이지만

여자의 등 뒤에 두르고 있는

손가락 사이에 담배가 물려 있다

연인과 무관하게

철학자처럼 건달처럼 사색하며 거닐며 타오르며

 

그가 포옹에 몰입하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뇌관이 터질 지경으로 달리는

팽창하는 여자의 등, 순정한 척추의 비탈이 보인다

매끈한 생머리의 가닥을 묶은 노랑 고무줄 때문인지

 

여자는 단거리 마라토너로도 보인다

남자의 분열된 손가락을 담배를 볼 수 없는

그녀의 뒷모습은 옮길 수 없는 섬 같다

 

가령 사랑을 나눌 때 티브이를 켜놓은 적 있다면,

껌을 씹은 적 있다면, 당신의 패(牌)는 경멸이다

 

 


 

 

권현형 시인 / 슴새라고 했니?

 

 

이리 와 봐, 슴새라고 했니?

내가 등 두드려줄 게

오후 세 시 반 늦점심 먹는 걸 보니

혼자 밥 먹기 조금 그런가보다

조금 그러해서 미루고 미루다

뻘을 읽느라고

신문이라도 읽느라고

고개를 수그리고 있구나

몸의 절반은 가슴인

흰 가슴이 몸의 절반인 새야

엊저녁 대관령에 폭설이 내렸단다

앞가슴까지 눈이 차올랐단다

춘삼월에 내리는 눈은

시름이다 찬밥이다

흰 에이프런으로 만든 시름을

앞섶에 몸의 절반에 두르고

국물도 없이 물빠진 갯가에서 식사중인 새야

이리 와 봐, 손따줄게, 외로움도 박복이라면

바늘로 너의 박복을 한 번만 콕

따끔하게 찔러줄게

 

 


 

권현형 시인

1966년 강원도 주문진 출생. 강릉대 영문과 졸업. 경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박사 과정 수료. 1995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중독성 슬픔』과 『밥이나 먹자, 꽃아』 『포옹의 방식』이 있음. 2006년 한국 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09년 제2회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시와시학 젊은 시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