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유라 시인 / 캄보디아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15. 05:00

박유라 시인 / 캄보디아

 

 

허물어진 사원

지붕 없는 탑 속에서 올려다보면

하늘이 우물처럼

연둣빛 나뭇가지를 띄워놓고 있네

탑신에 기대어 자라던 나무가

바람 위에 한쪽 팔을 올려놓고

오래 잊은 것

 

한없는 투명에 잠긴

붓다의 손가락

 

시간은 곤끝에서 풀려나가

하늘 아래 먼 변방까지

햇살 넓은 오후를 펼치고

긴 그림자를 던지고 있네

 

먼 먼

집으로 돌아가는 모든 발자국

지금은 내가 나귀처럼

고요에 기대어 서있는 시간  

 

 


 

 

박유라 시인 / 르네 마그리트*

 

 

바다가 잘려 있다

제가 그림인 줄도 모르면서 오리는

그림 밖 무한천공으로 눈을 뜨고

 

한 겹 바다 밖에서

한 쪽 손목이 오리 앞에 낙관을 찍는다

오리는 낙관을 모르고

낙관은 손목을 모르고

 

밖을 스쳐가는 낡은 풍경들

주소를 찾아가는 그림엽서처럼

혼자서 먼 길 자맥질해 가던 것들이

한 장 백지 위를 지나려는 순간

미동도 없이 벽에 딱 멈춰 선 그것을

무어라 불러야 할까

순간을 펴 늘여 무한이 되고 만 그것을

무어라 이름 불러야 할까

 

허공보다 깊이 눈 뜨고 싶어

허공보다 크게 눈 뜨고 싶어

저를 그리는 손목이 보일 때까지

손목을 흔드는 바람이 보일 때까지

 

나는 잘려진 바다 앞에 서 있고

서 있는 나를 보는 화실 밖 큰 눈을 모르고

 

* 르네 마그리트 (1898-1967) :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는 왕립미술학교에 입학해 그림을 배웠으며 입체주의와 미래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1926년부터 1930년까지 파리에 체류하면서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며, 살바도르 달리와 호안 미로, 그리고 시인 폴 엘뤼아르 등과 교류하였다. 마그리트의 작품에서는  다른 초현실주의자들과는 달리 초현실주의적인 시적 (詩的) 영감과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박유라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87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야간병동』 『갈릴레이를 생각하며』 『푸른 책』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