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성선 시인 / 설악운雪嶽韻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18. 05:00

이성선 시인 / 설악운雪嶽韻

 

 

神의 힘 가득한 雪嶽

큰 병풍 속으로

어느 날 휘적휘적

혼자 걸어 들어가는 이

 

들어간 후

몸이 보이지 않는 이

 

영봉靈峰에 구름으로 일어나고

골짜기 바람으로 물소리로 섞여

몸은 이미 버린 이

자유로운 이

 

가끔 새소리 속에 그의 말소리가 섞여 들리고

저녁 하늘에 그의 발자취가 보이고

밤의 물속에 별로 흩어져 깔린

 

보이지 않는 이

그러나 모든 곳에 보이는 이

 

영혼은 살 갈피에 숨어 뻐꾹이로 우는가

흐르다 고여 산 목련으로 피어나고

하늘을 지붕 삼고 떠돌다가

바위로 굳어 미소하는

 

산 열고 산 안에

고요로 앉아

눈물로 앉아

몸 다 비우고

 

어두운 어느 저녁, 산을 나오는 이

바닷가에 앉아 발을 씻는 이

 

이슥한 밤 달로 떠올라 허공을 걸어가는

그 발이 환히 빛나는 이

 

-1979년 「몸은 지상에 묶여도」

 

 


 

 

이성선 시인 / 별을 지켜 선 밤

 

 

나무 곁에서 별을 바라보면

내 몸에서 소리가 난다.

 

하늘의 물방울 음악이 들린다.

 

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온 사람은 안다.

볕이 가득한 나무 아래 서면

 

나뭇가지 실핏줄을 타고

숨소리 죽여 흘러내리는

별들의 하얀 강물 줄기.

 

내 몸까지 젖어 번쩍이는

저 우주의 물빛.

 

나무 아래에서 샘물을 마시면

내 영혼에 날개가 돋아난다.

 

나는 이미 하늘의 악기가 된다.

 

죽음 가까이 맑게 깨어

부르는 노래가 저승까지 흐른다.

 

내가 잠시 잠이 들어도

위대한 이는 내 안에 돌아와

 

강물로 별을 목욕시키며

소름 끼치는 물방울 향기 튕기어

가난한 날개를 씻는다.

 

-1985년 「나의 나무가 너의 나무에게」

 


 

이성선 시인 / 시간을 쓸어 내며

 

 

백지 앞에

시간을 쓸어 내며

시를 쓴다.

 

터진 영혼의

솔기를 거의 다 꿰매고

이제 마지막 점 하나

어디에 찍을까

망설이다

창밖에 눈을 준다.

 

흰 눈 쌓인 설악 산정에

西山이 돌아와 누워

내 모습에 크게 웃는다.

 

옷 한 벌 밥 한 끼로

금강산에도 두류산에도

높이 누워 놀았거니

 

이놈아,

대장부가

조사나 부처를 깨뜨리지 못하고

어찌 살아남기 바라느냐.

 

일갈에

번쩍 정신 차려

붓으로 시의 이마를 내려치니

 

백지 위에

맑은 솔바람 소리

한 줄

 

-1990년 「시간의 샘물」

 

 


 

 

이성선 시인 / 미시령 노을

 

 

나뭇잎 하나가

 

아무 기척도 없이 어깨에

툭 내려앉는다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너무 가볍다

 

-2000년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

 

 


 

이성선(李聖善) 시인(1941년∼2001년)

1941년 강원도 고성 출생. 고려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1969년 문학 동인 '설악문우회'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1970년 ≪문화비평≫에 작품 <시인의 병풍>외 4편으로 등단. 1972년 ≪시문학≫에 추천을 받아 재등단. '갈뫼 및 물소리' 동인으로 활동. 고려대학교 교육대학원 국어교육 전공 석사 학위. 1988년 강원도문화상. 1990년 제22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에 겸임교수. 시집 ≪시인의 병풍≫ 외 개인 시집 14권, 공동 시집 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