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차영미 시인 / 서석지(瑞石池)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0. 05:00

차영미 시인 / 서석지(瑞石池)

 

 

 돌담을 지나 하나 둘 우산을 펼쳐 들고 모이기 시작했다 400년이 넘은 은행나무에서 뭉친 빗방울이 떨어지고 연잎 위로 몸을 말아 올린 물방울은 연못 속으로 내려앉았다 바닥에 가라앉기도 하고 승천하지도 못했던 용이기도 했던 서석 무리가 하얗게 손짓하고 대청마루 경정에서 신선이 사는 소우주를 그렸던 선비의 목소리를 들었던가,

 

 흩날리는 징검다리를 지나 못 속에 웅크린 용을 바라보며 문드러진 도끼자루를 따라 나비가 놀고 떨어진 별 사이를 따라 들어온 물이 자욱이 빠져나가는 소리를 들었을까, 스무 개의 서석 사이로 해설자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점을 찍고

 

 머물다 간 사람들의 웅성임이 연꽃 가득한 연못 속으로 오래도록 떨어지고 있었다

 

 


 

 

차영미 시인 / 나선형을 골목이라고 부를 때

 

 

멈춰 있는 것은 죽은 것이라고 한 발씩 내디뎌야 한다고

흐르는 물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끌어들인다고 그는 말했다

 

오랜 우물을 들여다보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거울을 마주하고

발걸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주 길을 잃은 탓이었다

 

난간에 비스듬히 녹슬어가는 자전거, 어디선가 고등어 굽는 냄새가 나고

담배 연기는 벽과 벽 사이로 비켜서고 재개발을 묻는 전단지 혼자 서 있다

 

막다른 골목, 우리는 서로의 가면을 훔쳐보기로 손가락을 걸었고

계단 사이 길을 잃은 소음을 베어 무는 오후는 재바르게 걸어갔다

 

곡선으로 감겨오는 어스름 어딘가에서 숨바꼭질 중인 메아리는

검은 고양이와 벽과 그림 사이, 흔들리지 않는 흔적을 쫓아갔다

 

살아지는 것들 사이에서 사라지는 봄의 계단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름길이든 내리막길이든 소용돌이에서 잠시, 길을 잃어도 좋았다

 

- 시와반시 2018, 여름호 게재

 

 


 

 

차영미 시인 / 가을을 팝니다

 

 

어디서부터 가을일까요

가로질러 가을로 갈까요

강둑에 서서 편두통을 안고

서성이는 코스모스, 강아지풀을 담아봅니다

하얀 유니폼이 모여듭니다

자전거 도로를 휘몰아가는 동호회

야구공을 맞았다고 일렉트로닉 팝송이

카페 밖으로 걸어다니고

쑥부쟁이를 나르는 나비 한 쌍

카메라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가을을 복제하는 중입니다

파노라마 사진은 강을 둘러 안고

펴지지 않는 강을 베고

도로를 비켜가는 유모차를 바라봅니다

모로 누운 아파트단지 너머

야구장이 메아리를 소환하고

한쪽만 비어버린 기억

기다리던 오후가 내려앉습니다

옷을 갈아입지 못한 나무가

서성이는 강바람을 두드려 봅니다

작은 섬은 엉킨 풀을 안고

기억을 타고 흐릅니다

복제된 가을이 손을 흔드는

한 가닥 기억을 사고 있습니다

 

-시와사상 2018년 겨울호(99호)

 

 


 

차영미 시인

1969년 경남 사천에서 출생. 방송대 미디어 영상학과 졸업. 2009년 격월간 《서정문학》 시부문 등단. 2015년 계간 《시와 세계》 등단. 교계신문편집기자/ 편집디자이너. 서정문학 편집부장. 만해한용운시맥회 부회장 겸 총무.현재 도서출판 서정문학 대표. 소방방재청 UN백서 보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