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형심 시인 / 물 위의 집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1. 05:00

최형심 시인 / 물 위의 집

 

 

당신의 절반은 고요이고 남은 절반은 물입니다.

반달 오른편에 걸어 둔 심장은 누구의 것입니까.

푸른 연잎에 닿은 은나비와 해거름에 대해 말하고

당신은 저녁을 물고 가는 새떼 사이에서 어두워집니다.

물 안에 스미는 별들의 지느러미에 대하여

물길을 따라 떠나간 야간 여행자의 젖은 등에 대하여

당신은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절반은 고요이고 남은 절반은 물입니다.

막 풋별에 닿은 늙은 풍뎅이의 잠이 녹슨 배관을 파고들고

고요를 훔치는 생쥐들과의 숨바꼭질에 지친 당신

밤바람을 들춰 보는 손잡이가 떨립니다.

오랜 침묵의 무게에 무너져 내린 어깨 위로

물고기자리가 내려와 기대는데

푸른 벽돌 사이에서 낡은 연서 한 장이 날아오릅니다.

잡목이 우거진 묘지 위를 날개 없는 것이 날아갑니다.

물과 물 아닌 것들이 서로에게 번지고 있습니다.

 

계간 『포엠포엠』 2022년 봄호 발표

 

 


 

 

최형심 시인 / 물고기가 떠나는 저녁

 

 

엎드린다는 것, 이마를 만진다는 것, 눈가를 훔친다는 것, 머리카락 쓸려가는 소리를 듣는다는 것, 그리고 당신이 거기에 없다는 것,

 

이상하고 아름다운 고장에서 일기를 쓴다는 것, 사물함 속 죽은 딱정벌레를 만진다는 것, 아무도 없는 수요일을 견딘다는 것, 당신 없는 거리에서 발가락이 닳는다는 것,

 

밤의 날개 아래 들어가 숨죽인다는 것, 지구 저편 숲에 내린 비에 내가 젖는다는 것, 바람 없는 날 흔들린다는 것, 휘파람에 휘어진 마음이 꺾인다는 것,

 

보라색 색연필로 하늘을 그린다는 것, 얇은 수막(水幕)에 비친 하늘을 보며 끝없이 가라앉는다는 것, 손수레에 실린 바람 위에 당신 이름을 얹어 준다는 것, 사라진 당신 무릎에 눕는다는 것,

 

그리하여 은빛 소음도 없이 내 온몸이 부서진다는 것, 이제 내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

 

계간 『포엠포엠』 2022년 봄호 발표

 

 


 

최형심 시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과정 수료.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수료. 200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심훈문학상 수상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가 있음.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및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2014년 제4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2019년 제23회 심훈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