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나비 시인 / 기억의 건축학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21. 05:00

김나비 시인 / 기억의 건축학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계절, 내 몸에

전선 같은 핏줄을 설치하고

꾹 눌러 놓고 떠난 당신

 

초록이 뼈를 태우는 한 잎의 밤, 허공에

향이 손가락 풀어 하얀 그림 그릴 때

길게 자란 고요가 까무룩 졸고 있다

고사리 올리고 조기 올리고 떡 올리고 식혜를 올린다

배를 올리려다 말고 한참을 쳐다본다

 

꼭지가 떨어진 배꼽, 그 깊은

동굴 속에 녹아있는 여름 냄새를 만진다

작은 열매 노랗게 익자 탯줄을 잘랐겠지

움푹한 내 배꼽을 더듬어 본다

 

당신과 나의 이음줄이 있던 곳

내가 익어 세상에 나오자 잘리고 매워진 자국

그 속에 묻어둔 당신 맥박이 눈을 끔뻑인다

기억할 수 있는 기억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저린 기억인지

껍질을 벗기고 배꼽을 깊게 도려내 목기에 올린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이 향 쪽으로 몰려가 타는 밤, 흩어지는

연기 사이 웃고 있는 얼굴이

내 몸에 아득한 전류를 방출한다

심장에서 나온 맥박이 온몸으로 붉게 퍼진다

 

보이지 않는 것을 가득 담고 있는 자시(子時), 막힌

동굴 속에서 갓 태어난 달걀 같은 당신 숨소리

환하게 걸어 나온다

 

월간 『모던포엠』 2021년 2월호 발표

 

 


 

 

김나비 시인 / 어제 만날래?

 

 

물 위에 누워본 적 있니

얼어버린 물 위에서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왜 명치가 칼로 저며지는 것 같을까

 

뇌지도를 따라

2월의 일루리삿*으로 떠나 볼래

간유리 너머 뿌연 어제를 향해 날아가 보자

 

고래 심장을 한 컵 마셔볼까

뭔가 슬금슬금 떠오르는 게 느껴져

빙하에 귀를 대고 들어봐

유빙을 뚫고

쇄빙선이 달려오고 있어

 

물을 뿜어대며 반만 잠든 고래*를 깨워줄래

꿈속 계단을 따라 가슴으로 내려가면

두꺼운 얼음 밑에

혹등고래의 울음소리가 들려

세상을 잊고 세상에 잊힌 자, 티 없는 마음에 영원한 햇살**

 

잠들어있는 아슴한 겨울의 복판을

손을 뻗어 만져봐

견갑골 사이 스멀거리는 벌레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뿌연 햇살

팔을 뒤로 돌려 긁어봐

 

우리 지워진 어제에서 내일 만나

 

* 그린란드에 있는 작은 도시, 빙산이라는 뜻이다.

* 고래는 뇌를 한쪽씩 번갈아 가며 반만 쉬게 하는 방법으로 잠을 잔다

** 아렉산더 포프의 시 일부

 

월간 『모던포엠』 2021년 10월호 발표

 

 


 

 

김나비 시인 / 냉장고와 아버지의 역학관계에 대한 고찰

 

 

 그 집엔 취한 키클롭스*가 산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거실에서 잔다 눈치로 무장한 중심이 거세된 거인 한참을 그렁그렁 코를 골다 절명하듯 숨을 멈춘다 혹시나 해 툭 치면 갑자기 윙~하고 몰아쉬는 숨반짝이는 머리는 불빛 아래 더욱더 값싸게 눈부시다 냄새나는 발, 군데군데 까진 살갗 누리끼리하게 바랜 옷은 생몰연대를 가늠하기 어렵다 볼록한 몸속엔 소주, 김치 조각, 고추장 ,계란, 콜라 ,떡, 생선 갈변된 바나나, 얼음덩어리들이 뒤엉켜 있다 혼자서 저녁을 해결해야 하는 때를 대비해 아부지 곱창, 이영자 치킨, 왕십리 부대찌개 전단을 이름표처럼 붙여놓았다 한때는 혈기 왕성한 냉매를 풀어 집안에 칼바람을 불어넣기도 했다 이제는 쳐지고 녹아버린 낡은 고무장갑처럼 진득하게 거실에 눌어붙어 사는 에너지 효율 5등급 요크셔테리어도 흘끔거리며 지나친다 건드리면 풀썩 꺼질 것 같은 비대하고 늙은 외눈박이 언제든 전선만 빼면 흐르르 멈추고 말 것이다 오늘도 방에 들지 못하고

 

 거실에 혼자 누워 왕년을 되새김한다 문 여는 소리에 희미한 실내등 같은 미소를 켠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거인족. 이마 한가운데 눈이 있으며 오디세우스의 계략에 빠져 술을 마신다. 오디세우스에 의해 눈이 지져지고, 그가 동굴 앞에서 지키던 사람들이 탈출하게 된다

 

월간 『우리시』 2021년 6월호 발표

 

 


 

 

김나비 시인 / 오목한 기억

 

 

나는 걸어 다니는 화석이지

아득한 어제의 내일에서 말랑말랑하게 오늘을 사는

 

지금 난 미래의 어느 지층에서 숨을 쉬고 있는 걸까

오지 않은 시간 속, 닿을 수 없는 먼 그곳엔

오늘이 단단하게 몸을 굽고 있겠지

 

거실에 흐르는 쇼팽의 녹턴도 조각조각 굳어가겠지

밤마다 창밖에 걸었던 내 눈길은

오지 마을 흙벽에 걸린 마른 옥수수처럼 하얗게 굳어 있을 거야

 

이번 생은 사람이라는 포장지를 두르고 살지만

삐걱이는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지하 1층쯤 지층에는

내가 벗어버린 다른 포장지가 파지처럼 구겨져 있겠지

 

기억이 모두 허물어진 나는 나를 몰라도 어둠은 알겠지

귓바퀴를 맴돌며

내가 벗은 문양을 알려주려 속살거릴 거야

 

수억 년 전부터 지구를 핥던 어둠은

소리 없는 소리로 구르며 둥글게 사연을 뭉치고 있겠지

눈사람처럼 뭉쳐진 이야기를 은근하게 나르겠지

내가 갈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부는 바람의 몸통

 

그곳에서 난

검은 항아리 위에 새겨진 기러기처럼

소리를 지운 채 지친 날개를 누이겠지

 

돌과 돌을 들어내면

오목새김 된 내 무늬가 부스스 홰를 칠 거야

 

2017년  《한국NGO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김나비 시인

충북 청주 출생. (본명 김희숙). 청주대 국어국문학과와 우석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학과를 졸업. 2017년 《한국 NGO 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2017년 《시문학》 등단. 2019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수필집  『내오랜 그녀』와  『시간이 멈춘 그곳』. 시집 『혼인 비행 』(2020년), 『오목한 기억』. 2020년 안정복 문학상, 2021년 송순문학상 대상, 2021 사하모래톱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