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안정혜 시인 / 증명 사진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30. 05:00

안정혜 시인 / 증명 사진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동굴의 입구다

 

사각 프레임은

이끼의 푸른빛과

공명이 울리는 내부를 표현해야 한다

 

최선을 다해 표정을 지어보지만

삐딱하게 자라난 종유석의 각도와

정처 없던 박쥐 떼의 비행법을 증명할 수 없다

 

겹주름 속 돌개바람

어둠의 밀도가

잠잠히 맑은 물로 흘러가는 과정을 어떻게 이해시키나

 

햇볕 아래 탱자 열매

우레 소리

무지개의 빛깔들

 

만질 수 없는 세계를 향해

석순은 돋아나와 촉수를 뻗는다

 

내 안쪽 미답의 동굴에는

아직 풋감이 떫고

검은 등 물고기 떼가 요동치고 있는데

쳐들어오는 빛줄기 앞에서

미소가 자꾸 내 얼굴을 일그러뜨린다

 

—『문학나무』(2013. 봄)

 

 


 

 

안정혜 시인 / 나무늘보의 독법

 

 

복날 탑골공원

느티나무 아래 기어드는 나무늘보 한 마리

팔자걸음 느릿느릿 끌고 와 그림자를 부려놓는다

구부러진 어깨, 주름 가득한 피부

무가지신문 펼쳐 손가락으로 촘촘 짚어가며

활자를 떼어내듯 읽어나간다

손끝으로 열어보는 돋보기 너머 세상 소식들

속도전 치르듯 숨 가쁘게 찍혀있지만

나무늘보의 눈길은 더디게만 나아간다

이 빠진 하루의 퍼즐을 맞추는 노인 곁으로

쒱, 배달 오토바이 지나갈 때마다

활자가 우르르 엎질러진다

돋보기 바짝 들이대고 늘보가 신문을 읽는 동안

바람도 늘보걸음으로 걷고 있다

한때는 그도 속도를 숭배해

지름길 찾아다니고 탱고 리듬에 춤추고

더딘 사랑에 불편해했을 것이다

한땀한땀 손바느질 자국 같은 독법의 시간

노년의 읽기는 생의 속도를 벗어나 있고

간이역에서 후루룩 삼키던 국숫발 같던 어휘들은

하릴없이 뚝뚝 끊어진다

폭염이 쏟아져도 꿈쩍 않는 늘보의 그림자

끊어지는 소식 찬찬히 이어 다시 읽는 동안에

시계풀꽃은 무심히 피어나고 또 지고 있다

 

 


 

안정혜 시인

1965년 경북 봉화에서 출생. 2010년《시안》 신인상을 통해 등단. 현재 국제청소년연합 링컨학교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