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승철 시인 / 꼬리 잘린 꼬리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0. 31. 05:00

최승철 시인 / 꼬리 잘린 꼬리

 

 

 벽에 붙어 있는 달력 한 장은 밀림이다

 네모난 방을 넘으며 도마뱀이 꼬리를 자른다. 자정 무렵 하나의 담을 기어오르기 위해 도마뱀은 혀를 말아 올린다. 나는 벽을 넘어오는 도마뱀의 혀를 쿡 압핀으로 찍어 놓는다. 이브가 훔친 선악과는 시간이 아니었을까를 생각하며 나는 오늘의 방 안에서 뒹군다. 도마뱀들이 빠르게 네모난 방의 공기알들을 훔쳐 사방으로 달아난다. 쫓으려 하면 더 잽싸게 태양의 열매를 품고 달아난다. 한쪽 벽면에 쿡 찍어놓은 혀가 등 뒤에서 발버둥 친다. 나는 귀찮아져서 도마뱀의 꼬리에 순간 접착제를 발라버린다. 네모난 기억의 방에서 밀린 도마뱀들이 우글거린다. 제곱수로 늘어난 고개를 자꾸 지금의 방으로 내밀려 한다. 나는 거대한 압핀을 자정의 방 한 가운데 박고 위로 올라간다. 압핀을 잡고 도마뱀들이 나를 거쳐 가려고 쫓아온다. 꼭짓점에 가까워 질수록 도마뱀의 숫자가 늘어난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다. 도마뱀들이 압핀의 정상에 도달하기 전 나는 꼭짓점을 먹어버린다. 도마뱀들이 머리를 두리번거린다. 나는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꼬리가 잘린 말들이 분절된다. 내 몸은 거대한 시간의 문이다.

 

 


 

 

최승철 시인 / 어느 저녁의 수증기

 

 

 흰 종이 한 장 가득 당신의 이름을 적어 푸른 강물에 넣어줍니다. 당신의 이름 사이로 송사리 입술들이 오물거리며 지나갔을, 잉크가 퍼져 당신의 이름이 강물에 스며 들어갈 때까지 기다립니다. 푸른 잉크가 강물에 젖기 시작하는 시간이 있지도 않았을 때의 젖음을

 

 먼 훗날 바다로 흘러들어가 소금의 무게를 이겨낸 수증기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물에 젖었던 당신의 이름이 나비처럼 날아가 구름이 되고 비가 되어 그 글자의 주인(主人)을 찾아가게 될, 그 먼 어느 날의 조우(遭遇)에 대해 생각해보는 겁니다

 

 그 먼 그리움으로 외로워지는 어느 저녁의 마음은 꼭 흰 종이 위의 당신 이름 같아서, 나는 존재한다는 느낌도 없는 텅 빔으로 당신을 기다릴 때, 시간이 있기 이전의 사이로 푸른 송사리들이 지느러미를 마구 흔들어대는 데,

 

 흰 종이 한 장 가득 당신의 이름을 적어 강에 넣어 두면 인연이 닿는다는 연기설(緣起說)을 생각해 보는 겁니다. 내가 없는 시간의 이후에도 지상에 혼자 남아 밤물결 위에 내 이름을 적어볼 당신의 슬픔까지, 내 그리움에 포함시켜보는 겁니다. 그 푸른 열애(熱)에 대해

 

 


 

최승철 시인

1970년 전북 남원에서 출생. 원광대 국문과 졸업. 동국대 국문과 석사. 200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갑을 시티』(문예중앙, 2012)가 있음. 2006년 문예진흥기금 신진작가 창작 지원금 수혜. 2012년 대산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