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은교 시인 / 아벨 서점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3. 05:00

강은교 시인 / 아벨 서점

 

 

아마도 너는 거기서

희푸른 나무 간판에 생이라는 글자가 발돋움하고 서서 저녁 별빛을 만지는 것을 볼 것이다

글자 뒤에선 비탈이 빼꼼히 입술을 내밀 것이다

혹은 꿈길이 금빛 머리칼을 팔락일 것이다

잘 안 열리는 문을 두 손으로 밀고 들어오면

헌 책장을 밟고 선 문턱이 세상의 온갖 무게를 받아 안고 낑낑거리고 있는 것을 볼 것이다

구불거리는 계단으로 다가서면

눈시울들이 너를 향해 쭈삣쭈삣 내려올 것이다

그 꼭대기에 겁에 질린 듯 새하얘진 얼굴로 밑을 내려다보고 있는 철쭉 한 그루

아마도 너는 그때

사람들이 수첩처럼 조심히 벼랑들을 꺼내 탁자에 얹는 것을 볼 것이다

꽃잎 밑 나 닮은 의자 위엔 연분홍 그늘들이 웅성거리며 내려앉을 것이고

아 거길 아는가

꿈길이 벼랑의 속마음에 깃을 대고

가슴이 진자줏빛 오미자처럼 끓고 있는 그곳을

남몰래 눈시울 닦는 너울대는 옷소매들, 돛들을, 떠있는 배들을

배들은 오늘도 어딘가 아름다운 항구로 떠날 것이다

 

 


 

 

강은교 시인 / 시

 

 

모기 소리보다도 작게

십이월 햇빛 내리는 소리보다도 작게

 

낮달 뜨는 소리보다도 작게

노을 지는 소리보다도 작게

 

그렇게 그렇게

 

바람 소리보다도 크게

바다 우는 소리보다도 크게

 

벼락 소리보다도 크게

눈물 출렁이는 소리보다도 크게

 

공기의 소리이게

떠돌 곳도 없이 가득 떠도는.

별의 소리이게

눈뜨지 않고는 하늘 한가운데 눈뜨는

 

| 소리 없는 소리이게

그렇게 그렇게

 

나를 엎드리게 해다오

구름 흙 속속

시여

캄캄한 밝음이여.

 

 


 

강은교 시인

1945년 함경남도 홍원에서 출생. 연세대학교 영문과와 同 대학원 국문과 졸업. 1968년 《사상계》 신인문학상에 시 〈순례자의 잠〉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허무집』, 『풀잎』, 『빈자일기』, 『소리집』, 『붉은 강』, 『바람 노래』, 『오늘도 너를 기다린다』 등 다수 있음. 그밖의 저서로는 산문집 『허무수첩』, 『추억제』, 『그물사이로』 등과 동화로 『숲의 시인 하늘이』, 『하늘이와 거위』 등이 있음. 1975년 제2회 한국문학작가상과 1992년에는 제37회 현대문학상 등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