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향 시인 / 꽃밭을 걸으며 외 1편
김지향 시인 / 꽃밭을 걸으며
꽃들이 하늘에 펴인 책을 읽다가 문득 하얗게 바랜 하늘의 볼에 연지를 발라 준다
하얀 한낮을 등에 지고 사람들이 까만 기호로 떠서 느릿느릿 간다
하늘 연지를 훔쳐서 지상에 패대기치는 바람 한 소쿠리 지나간 뒤 사람의 머리 위로 불차가 간다 (우주로 흘러가는 붉은 시그널)
길가에 벌여 좌판 위의 백지 백지에 붉은 시그널을 붙잡아 넣으려는 한떼의 사람들
백지를 사려는 사람들이 값을 흥정하는 사이 백지에서 잠자던 복사인간들이 튀어 나온 사이 한 컷의 흰 배경을 벗고나온 복사 인간들이 땀을 닦으며 불차를 타고 간 사이
불차에서 힘이 빠진 기호 하나 뚝, 떨어진다 떨어진 내 발바닥에 화끈거리는 불차, 자세히 보니 수없이 밟힌 꽃잎이네
하루가 우주 밖으로 지워지는 발자국 소리만 요란할 뿐
-김지향 데뷔 50년 기념 시선집 '나뭇잎이 시를 쓴다' 중에서
김지향 시인 / 가을, 화약 냄새
시간은 부르지 않아도 달려온다
달려와서 낡은 잡기장 한 페이지 부욱, 찢어낸다 흘린 부스러기들은 열린 서랍 속에 밀어 넣는다
여름 시체를 담은 서랍들이 화장터에 쌓인다
푸르렀던 시절을 가슴에 넣은 가을은 시체들을 화장한다
세상 납골당엔 빨간 불꽃들이 앉아있다 화약 냄새를 안고
시간은 또 어디로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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