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채원 시인 / 얼룩무늬 화물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6. 05:00

정채원 시인 / 얼룩무늬 화물

 

 

지푸라기로 가득한 인형의

가슴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강철 스프링처럼

화물상자는 개봉되는 순간

당신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해석도 넘어서는

외부는 간결하다

 

빗속에 번들거리며

얼룩이 부풀어오르는 그 포장은

어딘가에서 잿빛으로 혹은 붉은 빛으로

표정을 바꿀지도 모른다

가장 불행한 시기에

가장 익살스러운 극본을 쓴 작가가 있다

 

쓰다 만 명세서와 거친 매듭으로 봉인된 상자 속

이름을 알 수 없는 짐승이 거친 숨을 몰아쉬는지

이따금 등 뒤가 들썩거린다

벽을 긁는 소리도 들린다

 

뼈마디 쑤시는 독감을 앓고 난 다음날, 혹은

오래도록 사랑하던 누군가를 갑자기 떠나보낸 뒤

천천히 한쪽 얼굴을 지우는 연습을 하는 저녁

달리는 화물의 무게가 조금 달라진다

 

우리 안을 서성거리는 울음소리

머지않아 당도할 목적지를 예감하며

눈을 감았다 주먹을 쥐었다 하고 있다

철저히 보호된 고독 속에서

한 생을 마쳐야 할 멸종위기의 짐승처럼

 

어둠이 만지고 간 것은 믿을 수 없다

 

 


 

 

정채원 시인 / 비몽 & 사몽

 

 

바늘꽃 사이로

사람이 지나간다, 개가 지나간다

 

여기는 누구의 꿈속인가

 

 


 

정채원 시인

1951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영문과 졸업. 1996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나의 키로 건너는 강』 『슬픈 갈릴레이의 마을』(민음사, 2008)과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문학동네, 2019)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