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원 시인 / 썩어도 건치 외 1편
정채원 시인 / 썩어도 건치
이빨 하나도 빠지지 않은 두개골이 눈구멍 속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끼었던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들 함께 싸늘히 진열된 채 나를 파고 또 판다
썩지 않는 구멍들 그 고리 속으로 나를 휘돌린다 나를 가둔다
죽어서도 출토되지 않는 집착이 있어 살 뜨거운 것들을 씹어 삼키려는가
이빨 하나도 잃지 않은 너는 어쩌다가 살부터 다 빼앗기게 되었나
영영 흙이 되지 못하는 흙투성이 황금반지와 팔찌만 거느린 채 제 안에 묘혈을 파고 또 파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팽팽하게 마주 보고 있다 결코 한 발짝도 건너편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서로에게 한없이 끌려가는 듯이 이빨 하나도 빠지지 않은 두개골이 눈구멍 속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그가 끼었던 반지와 팔찌와 목걸이들 함께 싸늘히 진열된 채 나를 파고 또 판다
썩지 않는 구멍들 그 고리 속으로 나를 휘돌린다 나를 가둔다
죽어서도 출토되지 않는 집착이 있어 살 뜨거운 것들을 씹어 삼키려는가
이빨 하나도 잃지 않은 너는 어쩌다가 살부터 다 빼앗기게 되었나
영영 흙이 되지 못하는 흙투성이 황금반지와 팔찌만 거느린 채 제 안에 묘혈을 파고 또 파는
산 자와 죽은 자가 팽팽하게 마주 보고 있다 결코 한 발짝도 건너편으로 끌려가지 않겠다는 듯이
서로에게 한없이 끌려가는 듯이
ㅡ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 2022년
정채원 시인 / 비로소 꽃
꽃은 뒤에서 봐도 꽃이고 거울 속으로 몰래 훔쳐봐도 꽃이고 비대면으로 봐도 꽃이다. 밥을 먹다 봐도 꽃이고 말다툼을 하다 봐도 꽃이고 걸레질을 하다 봐도 꽃이다.
내려다 봐도 지고 있고 올려다 봐도 지고 있다. 코미디쇼를 틀어놓고도 지고 있고 수염을 깎으면서도 지고 있고 자다 깨어 새벽까지 뒤척이면서도 지고 있다. 꽃을 버리면서 꽃은 꽃이 되고 있다.
우리집 신발장 옆에 놓인 꽃은 일 년 전에도 피어 있었고 어제도 피어 있었고 오늘도 피어 있다. 언제나 활짝 피어 있는 꽃은 꽃이 아니다. 질 줄도 모르는 건 꽃이 아니다.
나는 피었다가 기필코 지는 꽃을 사랑한다. 지는 모습을 감추지 못해 슬퍼하는 꽃을 오래 사랑한다. 지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꽃을 더 오래 사랑한다. 피기도 전에 져버린 꽃을 두고두고 잊지 못한다. 패색이 완연한 계절, 내 안에 너는 아직도 피어 있다. 비로소 꽃이 되었다,서로에게.
-시집 『우기가 끝나면 주황물고기』(천년의시작, 2022) 수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