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명서 시인 / 벽 속의 여자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10. 05:00

김명서 시인 / 벽 속의 여자

 

 

봄에는 죽은 나무도 몸을 일으킨다

 

어두운 숲 그늘처럼

차고 습한 몸

겹겹이 수의를 입은 듯

눕는다

눕는다는 것은 절규마저 잠재운다는 것이다

 

새벽의 박명을 꽝꽝 못질하는 신음소리

비애로 쌓이면

툭툭 모세혈관 터진

그 자리에 시퍼런 무늬로 음각되는 멍

 

진통제는 질 나쁜 비유처럼

아무것도 채우지도 품지도 못한다

헛되이

눈부신 통증만 키웠다

통증의 잔뿌리들이 아스포델로스같이

몸의 진액을 빨아들인다

 

얇아진 몸, 휘청

숲의 윤곽이 흐릿해진다

심호흡을 한다

 

절망조차 사치였던 것이다

 

 


 

 

김명서 시인 / 그림자나비

 

 

유리동굴 밖이 우주 끝이다 절대 나가지 마라

모친의 유언

뼛속을 파고든다

컴퓨터와 회전목마를 들여놓고 빗장을 닫는다

 

이끼 핀 천장에 불치의 고독이 종유석처럼 자라고 있다

 

자신의 그림자만이 진실이라고 믿고

"망루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라"는

유리벽에 돋을 새김 된 메아리를 지우는 사이

불혹에 걸렸다

 

어느 인류학자는 '종의 기원'은 오류투성이라며

머지않아 인간이 로봇과 이종교배를 할 것이라는

'유엔미래보고서'를 발설하고

정부에 대한 믿음의 비를 백분율로 나타내는데

절반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세상은 극점을 연출하는지

외계인을 닮은 영장류들

가늘고 긴 다리에 붙은 빨판을 상대의 가슴에 대고

단숨에 정보를 교환하고 있다

각자 뇌의 질량과 부피가 다른 탓에 그 용량만큼

소화하고 저장한다

누구나 만족한 낯빛이다

 

일부는 옛것이 그리워서 남루한 기억도 사고팔고

일부는 우량유전자를 밀매하고 있다

 

저 불쌍한 것들을 구해야겠다고

막 직립보행을 시작하려는 그를

철컥,

굴착기가 수거해 간다

 

 


 

김명서 시인(1949~2020)

1949년 전남 담양 출생. 2002년 《시사사》 창간호 신인작품상으로 등단. 시집 <야만의 사육제>. 제2회 <시사사> 작품상 수상. 계간 <시와 편집> 주간 역임. 〈노이즈〉 동인. 2020.5.17 지병으로 타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