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병호 시인(광주) / 혀 공화국

파스칼바이런 2022. 11. 19. 05:00

정병호 시인(광주) / 혀 공화국

 

 

녹슨 전지가위와 듬성듬성 빠진 톱니 사다리를 오른다

주목은 수형이 중요하다며 항상 원추형으로 키워야 한다는 아버지 말

푸른피 철철 흐르는 소리

 

자라는 힘 강해 위로만 위로만 솟구치려는 놈, 잘라내야 해

이런 놈은 주위에 그림자를 만들어 다른 가지들의 광합성을 방해해

 

병든 놈 해충에 감염된 놈도 문제야 해충은 전염성이 강해 건강한 가지에 나쁜 영향을 주지 우리는 건강하고 잘생긴 것들의 세계거든

 

밑에서 돋아나거나 아래로 뻗는 놈도 쳐야지 항상 불만을 가지고 있어 어떤 행동을 할지 몰라 이놈들이 우리를 위해 일하는 건 맞지만 수가 많아지면 우리가 만든 규칙과 질서를 파괴하려고 하지

세계는 조화로워야해

 

안으로 파고드는 놈도 제거해야지 중심은 소수의 세상이지 바깥쪽과 구분되는 고상하고 우아한 그런 곳 외부가 내부로 들어오면 분란을 일으켜 우리의 안락함을 깨지

 

얽힌 놈들도 솎아 내야지 우리 삶이 관계속에 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와 얽히고설키는 일은 곤란해

수준이라는 것이 있잖아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평행하게 가는 놈들도 손봐야지 우습잖아 애초에 상대도 되지도 않은 것들이 경쟁을 한다고 대드는 꼴이 아! 피곤한 건 딱 질색이야

 

우리말 잘 듣고 건실하게 잘 사는 놈들도 우리 세계에 어긋나면 버려야지

폼이 망가지잖아

 

사다리 내려온 그는 피라미드형으로 잘 다듬어진 주목을 보며 아버지 웃음 짓는다

잔뜩 인상 쓰고 있던 햇빛이 같잖다는 표정 지으며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정병호 시인(광주)

전남 광주 출생. 단국 대학교 졸업. <애지문학>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