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장옥관 시인 / 걷는다는 것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1. 19. 05:00

장옥관 시인 / 걷는다는 것

 

 

길에도 뼈가 있었구나

 

차도로만 다닐 때는 몰랐던

길의 등뼈

육차선 대로변 인도 한가운데 우둘투둘 뼈마디

샛노랗게 뻗어 있다

 

뼈마디를 밟고 저기 저 사람

한 걸음 한 걸음 걸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밑창이 들릴 때마다 나타나는

검은 혓바닥

 

갈라진 거울처럼 대낮의 허리가 시큰거린다

 

온몸이 혓바닥이 되어 핥아야 할 뼈마디

내 등짝에도 숨어 있다

 

 


 

 

장옥관 시인 / 꽃 찢고 열매 나오듯

 

 

싸락눈이 문풍지를 때리고 있었다

시렁에 매달린 메주가 익어가던 안방 아랫목에는 갓 탯줄 끊은 동생이

포대기에 싸인 채 고구마처럼 새근거리고 있었다

비릿한 배내옷에 코를 박으며 나는 물었다

-엄마, 나는 어디서 왔나요

 

웅얼웅얼 말이 나오기 전에 쩡, 쩡 마을 못이 몸 트는 소리 들려왔다

천년 전에 죽은 내가 물었다

-꽃 찢고 열매 나오듯이 여기 왔나요 사슴 삼킨 사자 아가리를 찢고 나 는 여기 왔나요

 

입술을 채 떼기 전에 마당에 묻어놓은 김장독 배 부푸는 소리 들려왔다

말라붙은 빈 젖을 움켜쥐며 천년 뒤에 태어날 내가 말했다

-얼어붙은 못물이 새를 삼키는 걸 봤어요 메아리가 메아리를 잡아먹는 소리 나는 들었어요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으며 미역줄기 같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얘야, 두려워 마라 저 소리는 항아리에 든 아기가 익어가는 소리란다

 

휘익, 휘익 호랑지빠귀 그림자가 마당을 뒤덮고 대청 기둥이 부푼 내 안고 식은땀 흘리던 그 동짓밤

썰물이 빠져나간 어머니의 음문으로

묵은 밤을 찢은

새해의 빛살이 비쳐들고 있었다.

 

 


 

장옥관 시인

1955년 경북 선산에서 출생. 계명대학교 국문학과와 단국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 졸업.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황금 연못』 『바퀴소리를 듣는다』 『하늘 우물』 『달과 뱀과 짧은 이야기』 『그 겨울 나는 북벽에서 살았다』등이 있음. 2004년 제15회 김달진문학상과 2007 제3회 일연문학상 수상. 현재 계명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정년 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