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극래 시인 / 그도 한때는 서랍을
조극래 시인 / 그도 한때는 서랍을 -나더러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가진 것들 얘기부터 할밖에 없다*
너무 오래 걸어 한쪽 다리가 마비된 안경도 삼류영화의 주인공처럼 질질 짜는 손수건도 치질 걸린 볼펜도 꽃피는 계절로 철길을 놓던 편지도 생살 뜯어 통증을 맛보던 손톱깎이도 어둠에 감전된 플래시도 우울병에 걸린 문고판 시집도
서랍의 어금니에는 돌아갈 날 기다리는 기도가 들끓고 있다
어두운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무릎에 깍지를 껴 본 사람은 안다 저 서랍도 한때는 우주 깊은 동굴 속에서 포효하는 거대한 침묵이었다는걸
언제쯤이면 그는 뜨거운 손을 내밀 수 있을까 구름의 닳은 신발 끄는 소리에도 울컥거리는 눈동자를 가진
지금쯤 그는 우산이 되어 먼 곳을 걸어와 발가락이 물컹해진 빗물의 하소연을 듣고 있겠지 외롭게 자란 오후를 무릎에 앉힌 벤치가 되어 있겠지 허공에 젖 물리는 꽃잎을 보며 울먹이고 있겠지 슬픔으로 무장한 한때의 일기처럼 비로소 눈먼 새가 혓바늘로 허공에 어둠의 실밥을 풀어헤치면 어둠보다 넘쳐 본 일이 없는 그는 집을 향해 무거운 걸음을 집요하게 퍼나르겠지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한 기억이 없어서 서랍은 여전히 어금니가 시큰거리고
*네루다(Pablo Neuda, 1904~1973)
계간 『시산맥』 2022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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