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 시인 / 붉은 시간 외 1편
정선 시인 / 붉은 시간
1
남자는 소 몸에 찍힌 푸른 번호가 사형수의 번호 같다고 생각했다
제비추리로, 양지머리로 대접살로 차돌박이로, 아롱사태로, 채끝으로, 홍두깨살로, 잘 발라진 살덩어리들이 갈고리에 걸려 있다 가게를 지나칠 때마다 몸이 고깃덩어리로 발라진 것 같은 착각에 몸서리를 친다 허나 생이란 저렇듯 붉어야 하고 죽어서까지 부위별로 쓸모가 있어야 한다고 자신을 한 번 뒤돌아보는 것이다
2
기계에 잘려 나간 손가락이 아리는 밤 허투루 내동댕이쳤던 날들을 헹궈 수없이 무두질했던 남자는 부위별로 발라진 고기들을 냉동차에 싣고 달린다 밟힐수록 시간은 날개가 돋는다 남자는 자신의 몸을 소처럼 나누어 본다 때때로 토막 난 살덩어리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갈비뼈에 붙은 살점은 씹을수록 달콤하고 꼬릿살은 아직도 쇠파리 쫓는 채찍만큼 힘이 있고 사골뼈는 금방이라도 불끈 일어나 도로를 질주할 것만 같다
남자는 이왕 정육점 진열장에 걸릴 거면 뒷다릿살로 걸렸으면 싶다 뒷심이 없어 털푸덕 주저앉고야 마는 세상 냉동이 풀리는 날 두 다리로 버티는 땅엔 숨은 촉들이 올라오고 가죽은 탱탱한 북소리로 태어나고 촛불을 밝혔던 기름은 동종을 만들고 시뻘건 피는 아침을 해장시키고 가랑이에서는 소 울음 우렁우렁할 것을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에서
정선 시인 / 변기는 변기가 아니다
아파트 정문 담벼락 옆 깨진 변기가 버려져 있어요 그 속에 강아지풀이 오고 가는 사람들을 지켜봐요 제 몫 다하느라 땡볕 아래 땀을 흘려요 태어난 대로 깜냥대로 옳거니 변기를 똥오줌 받는 그릇이라고만 생각한다면 무슨 재미있겠어요? 마그리뜨라면 변기통을 성채처럼 구름 위에 세우고 붉은 유도화 꽂았을 것을 나는 이제 노랑 빨강 초록 변기에 돼지국밥을 말겠어요 보셨죠, 잘록한 허리와 펑퍼짐한 아가리 매끈한 피부 어디 하나 빠질 데라곤 없는데 뚜껑을 열면 김이 날름날름 피어오르는 벌건 국물, 살맛 입맛 돋우고 한겨울 몸을 데우는 데 제격 아닌가요? 육십 넘은 할아버지가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들 바오밥나무가 뿌리 뻗어 하늘을 넘본들 누가 말리겠어요 색안경을 쓰세요 박힌 생각들을 배배 꼬세요 한 사내의 시큼한 배설물을 얼마 전까지 온몸으로 받아냈을 오지랖 달항아리를 꿈꾸지 않는 넉살 푸짐한 썩 괜찮은 놈 이야기지요
-시집 『안부를 묻는 밤이 있었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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