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향란 시인 / 타인의 것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 05:00

이향란 시인 / 타인의 것

 

 

 그가 도장을 찍는다. 나는 사인을 한다. 가볍고 밋밋한 종이 서너 장에 이백 평 남짓의 땅이 널브러져 있다. 그 땅 위를 넘나들던 태양과 비와 구름과 그곳에서 자라던 이름 모를 작은 나무 몇몇과 그 나뭇가지 사이를 좋아라 날아다니던 새들과 발자국 없이 막무가내 기어오르던 온갖 벌레와 주변의 잡초들이 생애 처음으로 저녁을 맞는다. 내게 본적을 두고 뿌리내리던 모든 것들이 선택의 여지 없이 다른 이에게 팔려 간다. 사람과 사람 높이만큼 오르내리던 말과 삐뚤거리는 글씨와 먹구름으로 도장을 찍고 달빛 사인하는 것으로 타인의 것이 된다. 신의 옆구리를 훔쳐 내 것이라 명명해 왔던 것들이 바퀴없이 타인에게 천천히 굴러간다. 입과 눈과 귀가 틀어막힌 채 은빛 거미줄마저 고스란히

 

 아무도 모르게 그려 넣었던 오로라는

 절대 매매할 수 없는 나만의 것

 

 흘리지 않게 집으로 가져와 장롱 속에 감춘다

 

 


 

 

이향란 시인 / 낚싯바늘에 걸린 돔에게

 

 

바다 밖 또 다른 세상을 위해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한다면,

몇 분 동안 온 몸을 푸들거리며 비린내를 털어

마치 지구 밖 우주를 경험하듯이 그런 신비와 내통하게 됐다면,

입질이 결코 서툴렀다고 탓하지는 않을 게다

물기를 말리며 너를 따라 올라온 바다 그리고 플랑크톤, 해저의 지느러미들

짧고 눈부신 환희의 대가로 안주상의 육질 좋은 횟감이 되더라도

눈알에 꽂혔던 세상은 네게 늘 파라다이스가 아니었는지,

스스로 솟구치는 고래가 아니고서는

어느 이의 미끼에 제 생을 꿰찬다는 건 그리 흔치않은 일

깊고 적막한 바다의 속내만큼 오래도록 조용히 흔들려왔을 간절한 것들

그리하여 속절없는 것들

심장이 멎는 그때까지라도 잠깐 아주 잠깐

자 보아라, 그리고 얼른 추억하라

누군가의 먹잇감을 위해 바늘이 아가미를 관통해도

영영 살아보지 못한 것이 수많은 영혼의 가시로 박힌다면

물 위의 세상, 그 한 겹의 비리지 않은 황홀경에 주둥이를 띄우다가

퍼더덕! 마지막 숨을 매달아도 기뻐 눈물 나지 않겠느냐

 

 


 

이향란(李香蘭) 시인

1962년 강원도 양양에서 출생.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 졸업. 2002년 첫 시집 『안개詩』로 작품활동 시작. 『슬픔의 속도』 『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 『너라는 간극』이 있음. 2009년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문학도서(『한 켤레의 즐거운 상상』)선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