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란 시인 / 숲에서 외 2편
이미란 시인 / 숲에서
한 시대의 바람이 황황히 가고 한 시대의 바람이 황황히 온다 그러니 사람들이여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갈참나무 밑동을 흔들며 노랗게 봄이 오나니 그러니 사람들이여 동면 속 깊은 꿈을 털고 일어나 갈참나무 밑동을 보러 갈 일이다 노랗게 노랗게 흔들리며 노랗게 노랗게 살아 볼 일이다
이미란 시인 / 서랍을 정리하며
서랍을 열면 서랍 속엔 나프탈렌에 절여진 무릎과 팔뚝의 세월이 보인다 서랍과 서랍 사이를 통과해 간 숱한 인연의 눈동자가 보인다
빽빽한 잡동사니의 비밀인 가문비나무 숲 벌목공의 톱날 위로 멀리멀리 달아난 새들의 빈 둥지 목수의 대패질 사이에 묻혀 간 나이테의 역사 가로와 세로의 능숙한 손놀림과 망치 소리 따라 사라진 나무의 초록 향기
날마다 유연해지는 모든 입김의 아침과 거리에서 마침내 서랍은 계산된 누군가의 생 속으로 배달이 되고 서랍은 그의 노래가 되고 서랍은 그의 인생이 되고
서랍을 연다 서랍 속엔 지나온 악수와 악수인 시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가문비나무 숲을 달아난 오래전의 새소리가 들린다
시집 『준비된 말도 없이 나는 떠났다』 시와 시 학사(1999) 중에서
이미란 시인 / 개천에는 용이 살지 않는다
개천에는 더 이상 용이 살지 않는다 그 동안 너무도 많은 용을 배출한 개천은 지금은 씨가 말라붙어 버렸다는 소문만 무성하다 비루한 흙탕물 속에서 여의주를 입에 물고 출세한 용들은 지상의 따뜻한 품속으로 도망치듯 숨어들어 어릴 때부터 자신을 먹이고 키운 고향으로 금의환향의 꿈을 버리고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다 우물 안 개구리 같았던 비좁고 심심한 개천을 나와 어머니의 따스한 품보다 더 넓고 편안한 지상의 온갖 풍요와 부귀영화를 맛본 용들은 승승장구의 줄타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들은 지상보다 천국이라는 하늘로도 승천하지 않았다 천국도 이미 로얄석의 자리는 거의 매진되어 선착순만 가능하다는 불안한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명예와 부와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지상의 안온한 삶에 비늘을 담그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하여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었다 그 말은 잊혀진 낡은 전설이 되어 버렸다 개천에는 이제 용이 살지 않는다
계간 『창작21』 2021년 여름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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