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미 시인 / 비문 사이로
이혜미 시인 / 비문 사이로
얼굴이 사라질 때까지 걸었어. 이마에 얹히는 부드러운 흙의 질감을 느끼며. 모르는 시간을 향해 조금씩 다가가는 경외로. 육체를 잊어가는 영혼의 기쁨으로.
사랑과 사라짐이 멀지 않아서 어떤 애도는 끝나지 않는 산책 같았지.
비석들은 누군가 턱을 괴고 기다리는 창문 같고 외로움이 굳어진 종유석 같다. 푸른 용광로 속에서 서서히 녹아가는 사람들. 무덤이 죽음을 굳히는 중인 거푸집이라면 우리는 기꺼이 먼저 떠난 이들의 창가로 가겠지. 놓쳐가며 이루어내는 걸음으로. 닿지 않는 곳을 떠올리면 조금 더 살아 있는 것 같았으니까.
뒤덮인 이끼 냄새를 맡으며 잠든 자들이 각자의 반원 아래 깃드는 지금. 꿈꿔오던 미래를 미리 가진 듯했어. 서로에게 다정히 기댄 어깨를 지나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조금만 더 걸을까, 그림자를 겹치며 돌아가는 법을 잊은 사람들처럼.
*“Hodie mihi, cras tibi.” 로마의 공동묘지에 새겨진 문장.
계간 『문학과 사회』 2022년 여름호.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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