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시인 / 한산(寒山)에서 외 1편
황유원 시인 / 한산(寒山)에서
겨울엔 발이 차다 마음은 안 시리고 양손도 따뜻한데 찬 발이 떼로 시리다 그날 퇴근길에 괜스레 걸어봤던 동호대교 얼어붙은 한강 위에 서 있다 일렬로 날아오르던 새떼들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찬 발이 겨울 같다 네가 십 년 전에 사준 등산 양말을 나는 아직도 겨울마다 꺼내 신는다 방안에서만 밖에서는 안 신고 발이 시린 방안에서만 신다가 겨울이 사라질 것 같으면 다시 벗는다 시린 발로 그동안 가본 모든 차가운 나라라도 다시 가본다 발이라도 차야 한다 마음이 안 시리면 양말이라도 벗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다시 밀려오는 새벽에 발이 시리면 나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만 같고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을 테지만 어디로 가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 시린 발이 새벽 같다 모든 새벽의 발이 시리고 모든 새벽의 발이 양말을 신길 꺼리는 것 같다 늦은 새벽 술자리에서 꼰대는 자꾸 내게 너는 시인이니까 멋진 마무리 멘트나 하나 해보라는데 시인은 그런 거 대신 그저 양말이나 벗고 시린 맨발이나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밤새 미친놈처럼 맨발로 혼자 겨울 산에나 오를 수 있을 뿐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멋진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그 생각 읊어줄 생각에 이가 다 시려올 때까지! 그러다 발이 사라질 것 같을 때쯤 정신이 번쩍 들어 이제는 발목 다 늘어난 양말 양손으로 벌려 그 속으로 너무 늦게 들어가보기도 한다 사라질락 말락 하던 발이 양말 속에서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선배 시인 한산(寒山)도 산중의 추운 밤이면 옛날에 누가 사준 양말 꺼내 신고 잤을까 알 수 없지만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이제 이 양말은 전신이 축 늘어져 집에서밖에는 신을 수 없게 돼버렸지만
황유원 시인 / 짧은 술자리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도 있지만 그냥 그대로 고여 있는 울음이 있다
놀러온 인간들이 다 꺼내 마시고 웃고 떠들다 만취할 때까지 쏟아지지 않고 그저 자리만 옮기는 울음
내 안에서 네 안으로 그것은 옮겨간다 역의 대합실에서 잠든 밤 기차로 옮겨가는 여행자처럼
끝내 고요한 울음이 있다 늘 수평하고 초지일관이므로 누구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고 지나갈 땐 그 앞에서 예를 갖춘다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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