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황유원 시인 / 한산(寒山)에서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14. 05:00

황유원 시인 / 한산(寒山)에서

 

 

겨울엔 발이 차다

마음은 안 시리고

양손도 따뜻한데

찬 발이 떼로 시리다

그날 퇴근길에 괜스레 걸어봤던 동호대교

얼어붙은 한강 위에 서 있다 일렬로 날아오르던

새떼들 생각을 한 것도 아닌데

찬 발이 겨울 같다

네가 십 년 전에 사준 등산 양말을 나는 아직도

겨울마다 꺼내 신는다

방안에서만

밖에서는 안 신고

발이 시린 방안에서만 신다가

겨울이 사라질 것 같으면 다시 벗는다

시린 발로

그동안 가본 모든 차가운 나라라도 다시 가본다

발이라도 차야 한다

마음이 안 시리면

양말이라도 벗어야 한다

그러다 문득 다시 밀려오는 새벽에 발이 시리면

나는 어디도 갈 수 없을 것만 같고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을 테지만

어디로 가도 여기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아

시린 발이 새벽 같다

모든 새벽의 발이 시리고

모든 새벽의 발이 양말을 신길 꺼리는 것 같다

늦은 새벽 술자리에서 꼰대는

자꾸 내게 너는 시인이니까

멋진 마무리 멘트나 하나 해보라는데

시인은 그런 거 대신 그저 양말이나 벗고

시린 맨발이나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밤새 미친놈처럼 맨발로 혼자

겨울 산에나 오를 수 있을 뿐이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멋진 생각이 떠오를 때까지

그 생각 읊어줄 생각에 이가 다 시려올 때까지!

그러다 발이 사라질 것 같을 때쯤

정신이 번쩍 들어

이제는 발목 다 늘어난 양말 양손으로 벌려

그 속으로 너무 늦게 들어가보기도 한다

사라질락 말락 하던 발이

양말 속에서 말랑말랑해질 때까지

선배 시인 한산(寒山)도

산중의 추운 밤이면

옛날에 누가 사준 양말 꺼내 신고 잤을까

알 수 없지만

벌써 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갔지만

나는 아직 잊지 않았다

이제 이 양말은 전신이 축 늘어져

집에서밖에는 신을 수 없게 돼버렸지만

 

 


 

 

황유원 시인 / 짧은 술자리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도 있지만

그냥 그대로

고여 있는 울음이 있다

 

놀러온 인간들이 다 꺼내 마시고

웃고 떠들다 만취할 때까지

쏟아지지 않고

그저 자리만 옮기는 울음

 

내 안에서 네 안으로

그것은 옮겨간다

역의 대합실에서

잠든 밤 기차로 옮겨가는 여행자처럼

 

끝내 고요한 울음이 있다

늘 수평하고

초지일관이므로

누구도 그에 대해 뭐라 하지 못하고

지나갈 땐 그 앞에서 예를 갖춘다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 중에서

 

 


 

황유원 시인

1982년 울산 출생.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인도철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세상의 모든 최대화』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가 있음. 제34회 김수영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