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류빈 시인 / 집.zip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16. 05:00

최류빈 시인 / 집.zip

 

 

하나의 집 안에도 문이 있습니다

구획을 나누는 표지처럼

하나의 집 안에서도 여러 가지 향기가 납니다

저녁놀이 거실 창틀에서 내방까지 내릴 쯤

부엌으로 저마다의 판화를 들고 와

하나의 솥 안에 쏟아냅니다

아버지의 블루칼라 잉크가 가장 밑바닥에서

보글보글 끓어올 때쯤 솥을 휘저어 냅니다

하나의 집 안에도 다른 모양의 방이 있습니다

제 방이 고이 접힌 시집처럼 반듯한 모양이라면

어머니의 방은 아마 저를 따라

설피 각진 석고상자 모양일겁니다

둥근 모양의 방을 갖고 싶으셨겠죠, 아마

 

하나의 집 안에 가족이라는 명패를 내 겁니다

압축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저마다

완전히 짓눌리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최류빈 시인 / 아닌 여행

 

 

비행운, 허공에 밑줄 하나 그인다. 내가 아닌 저 빈 곳에

우린 강조될 수 없고

타슈켄트 사원

사진을 찍는 한동안 작은 액정만을 바라보았다

 

맛집을 검색한 뒤 잘 닦인 신작로를 걷는다

신은 덤불 뒤편에 숨어 식사를 했어

미슐랭 별점 없이도

 

마천루, 두리번거리는 한철 여행자들

우린 몸담은 저공을 가늠할 줄 몰랐으니

삐죽거리듯 높게 걸려 빛나는 첨탑만을 경배했다

눈먼 기도와 해시태그

 

옥탑방 작은 숙소 전신거울 앞에 선다

거기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

탐구된 적 없는 영원한 불모지

그는 중흥동 집에서도 봤던 사람,

 

허나 너는 기억하고 싶은 히든플레이스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저 남자를 부러 낯선 이국까지 데려왔으나

아직도 삼인칭 낯선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너의 습성

배경을 뒤로 민채

거울 속 남자와 길게 키스한다

나의 턱 밑으로 붉은 밑줄이 스-윽

시렸던 상처처럼

 

이제 배낭을 맬 준비가 됐어

 

 


 

최류빈(崔柳頻) 시인

1993년 전북 익산에서 출생. 전남대학교 생물공학, 시설경영학 전공 중. 2017년《포엠포엠》에 <간빙기 밥통> 등 3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오렌지 신전』 『장미氏, 정오에 피어줄 수 있나요』 『몇 시간씩 생각하곤 해』가 있음. 2018년 광주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 〈천강문학상〉 · 〈최충문학상〉 우수상, 〈동교인재상〉 대상(문학 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