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류빈 시인 / 집.zip 외 1편
최류빈 시인 / 집.zip
하나의 집 안에도 문이 있습니다 구획을 나누는 표지처럼 하나의 집 안에서도 여러 가지 향기가 납니다 저녁놀이 거실 창틀에서 내방까지 내릴 쯤 부엌으로 저마다의 판화를 들고 와 하나의 솥 안에 쏟아냅니다 아버지의 블루칼라 잉크가 가장 밑바닥에서 보글보글 끓어올 때쯤 솥을 휘저어 냅니다 하나의 집 안에도 다른 모양의 방이 있습니다 제 방이 고이 접힌 시집처럼 반듯한 모양이라면 어머니의 방은 아마 저를 따라 설피 각진 석고상자 모양일겁니다 둥근 모양의 방을 갖고 싶으셨겠죠, 아마
하나의 집 안에 가족이라는 명패를 내 겁니다 압축된 삶을 삽니다 그러나 저마다 완전히 짓눌리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최류빈 시인 / 아닌 여행
비행운, 허공에 밑줄 하나 그인다. 내가 아닌 저 빈 곳에 우린 강조될 수 없고 타슈켄트 사원 사진을 찍는 한동안 작은 액정만을 바라보았다
맛집을 검색한 뒤 잘 닦인 신작로를 걷는다 신은 덤불 뒤편에 숨어 식사를 했어 미슐랭 별점 없이도
마천루, 두리번거리는 한철 여행자들 우린 몸담은 저공을 가늠할 줄 몰랐으니 삐죽거리듯 높게 걸려 빛나는 첨탑만을 경배했다 눈먼 기도와 해시태그
옥탑방 작은 숙소 전신거울 앞에 선다 거기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어 탐구된 적 없는 영원한 불모지 그는 중흥동 집에서도 봤던 사람,
허나 너는 기억하고 싶은 히든플레이스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저 남자를 부러 낯선 이국까지 데려왔으나 아직도 삼인칭 낯선 문법으로 이야기하는 너의 습성 배경을 뒤로 민채 거울 속 남자와 길게 키스한다 나의 턱 밑으로 붉은 밑줄이 스-윽 시렸던 상처처럼
이제 배낭을 맬 준비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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