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재훈 시인 / 풀잎의 사소한 역사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0. 05:00

이재훈 시인 / 풀잎의 사소한 역사

 

 

누군가를 섬긴 적이 없습니다.

꿈은 늘 꾸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땅을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일 분 일 초의 생존만이 철학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요.

 

친구는 무엇일까요.

 

명예와 구걸은 같은 말이라는 걸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로 남겠죠.

늘 팔을 축 늘어뜨리고 웁니다.

먼저 울고 먼저 머리를 흔들고 먼저 죽습니다.

비바람은 늘 이기적이죠.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계절을 얘기해줍니다.

옛 친구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찬바람 때문입니다.

서늘한 저녁 때문입니다.

 

 


 

 

이재훈 시인 / 소나기

 

강은 미소를 모르죠

그저 흘러가면 그뿐

한가로이 전설을 듣던 날이 많았지요

난로 위 주전자와 퉁명스럽게 눈이 마주치는 날이었죠

운명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죠

속삭임은 늘 거짓으로 건너가요

날 가로막는 것은 말이 아니라

떠나는 마음 혹은 떠보는 마음

당신에게도 털이 있다면 말을 떠올려 보세요

멈추지 않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속도를 상상하세요

증오를 이길 긴 잠을 생각해봐요

마을버스를 건너고 지하철을 건너곤하죠

그러나 나무가 되는 날도 있었어요

성스러운 곳에서만 가족을 생각했어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이 환대하던 날

나는 시신이 아닌데, 나는 슬픔이 아닌데

온 세상의 하늘과 구름을 떠받쳐야 해요

형벌이 다가오고 있어요

온몸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고 있어요

 

- 『시로여는세상』 2021 겨울호

 

 


 

이재훈 시인

1972년 강원 영월에서 출생. 건양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과정 졸업. 199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명왕성이 되다》 《벌레 신화》가 있음.  저서 : 《현대시와 허무의식》, 《딜레마의 시학》, 2017. 백석대 한국서정시문학상. 현재 《현대시》 부주간, 중앙대와 건양대에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