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훈 시인 / 풀잎의 사소한 역사 외 1편
이재훈 시인 / 풀잎의 사소한 역사
누군가를 섬긴 적이 없습니다. 꿈은 늘 꾸지만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땅을 내려다보지 않습니다. 일 분 일 초의 생존만이 철학입니다. 기도하는 집이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바쁩니다.
죽음 앞에서 사랑이 무슨 소용일까요.
친구는 무엇일까요.
명예와 구걸은 같은 말이라는 걸 결국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존재로 남겠죠. 늘 팔을 축 늘어뜨리고 웁니다. 먼저 울고 먼저 머리를 흔들고 먼저 죽습니다. 비바람은 늘 이기적이죠. 예기치 않게 찾아와서 계절을 얘기해줍니다. 옛 친구에게 소식이 왔습니다. 찬바람 때문입니다. 서늘한 저녁 때문입니다.
이재훈 시인 / 소나기
강은 미소를 모르죠 그저 흘러가면 그뿐 한가로이 전설을 듣던 날이 많았지요 난로 위 주전자와 퉁명스럽게 눈이 마주치는 날이었죠 운명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게 하죠 속삭임은 늘 거짓으로 건너가요 날 가로막는 것은 말이 아니라 떠나는 마음 혹은 떠보는 마음 당신에게도 털이 있다면 말을 떠올려 보세요 멈추지 않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속도를 상상하세요 증오를 이길 긴 잠을 생각해봐요 마을버스를 건너고 지하철을 건너곤하죠 그러나 나무가 되는 날도 있었어요 성스러운 곳에서만 가족을 생각했어요 초원에서 풀을 뜯는 말이 환대하던 날 나는 시신이 아닌데, 나는 슬픔이 아닌데 온 세상의 하늘과 구름을 떠받쳐야 해요 형벌이 다가오고 있어요 온몸이 차갑고 딱딱하게 굳고 있어요
- 『시로여는세상』 2021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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