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왕노 시인 / 내 애인들의 세상 외 2편
김왕노 시인 / 내 애인들의 세상
이 세상에 내 애인들의 세상인 것을 알아, 알면 좀 조심스럽게 이 세상을 사용하라고, 물을 아끼는 것은 당연 함부로 침을 뱉거나 꽃을 꺾지 말라고, 제발 어지럽히지 마
애인들은 무슨 빌어먹을 애인이냐고 묻지 말고 따지지 말고 내 마음이 가는 것은 사물이든 뭐든 애인이라 불러 애인이 많은 세상이란 말만 들어도 얼마나 속이 든든하냐.
내가 애인이라 부르면 가만히 기대어 오는 바람을 알아 사시나무 자욱한 그림자를 사람을 애인이라 부르면 애인도 되지만 싶게 악인도 되는 애인과 악인은 좁히고 좁히다보면 쉽게 겹쳐 그 거리 멀지 않는 속성이 있으므로 한번 애인이라 불러준 꽃은 시들면서도 나를 애인의 눈빛으로 바라보므로 꽃이 가득한 세상 내 애인이 가득한 세상이란 비논리적인 논리를 알기는 알아
구름이 내 애인이라 장수하늘소가 나는 언덕에 서서 구름을 바라보는 화창한 오후를 알기는 아느냐고 구름의 궤적이 어디로 향하는지 상상하는 즐거움을 만인의 애인인 마릴리 먼로도 나타샤도 카르멘도 비운의 여류화가 나혜석도 프리다 칼로도 우리 모두의 애인 주식도 내 절망도 붉은 신호등도 전복되는 차도 다 애인
우리의 푸른 문장 속에서 혜성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버지니아 울프도, 순애보의 윤심덕, 사의 찬미란 쓸쓸한 노래도 애인이라는 것, 모든 것을 애인이라 부르고 모두를 애인이라 부르면 불화가 뭐 있겠나. 애인의 잘못은 내 잘못 애인이 술을 조금 못해도 큰 실수를 저질러도 다 내 잘못
그 별 푸른 밤도 내 애인이라는 것을 알아, 그 푸른 별빛으로 혁명의 문장을 쓰고 혁명을 위한 전단지를 만들며 태우던 한 개비 담배도 내가 태워버린 애인, 나를 검거하러 다니던 어두운 밤의 구두 발자국 소리도, 나와 연을 맺는 모든 것은 악연이든 필연이든 좋은 인연이든 다 애인관계라는 것 터무니없는 괴변에 웃을지 몰라도 하여튼, 세상은 내 애인의 세상
수천수만 섬의 별을 밤하늘에 뿌리고 탁탁 손을 터는 장엄한 우주의 손길도 보일 듯 말 듯 한 작은 풀꽃도 개미 빈대도 애인 별 지랄하고 앉았네. 할지 몰라도 나와 함께 동시대를 사는 그 모든 것은 애인, 너도 나의 애인, 나도 너의 애인이라는 것을 바보야, 알기는 알았느냐고, 너도 세상을 네 애인의 세상이라 해봐 다정하게 다가오는 세상이니, 그게 삶의 비법이고 해법이 아니겠나.
다시 한 번 외친다. 세상은 내 애인들의 세상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난 장미의 골수분자
뭐 궁리에 궁리를 하며 따질 것이 있느냐. 뭐 볼 것이 있느냐. 우리도 장미 당이 되어 장미의 숲으로 가는 거다. 장미 당의 골수분자가 되어 아직도 메아리치고 있는 러브 이즈 필링, 러브 이즈 터치, 가자, 장미여관으로 ! 외친 시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회색분자는 싫어. 철새가 떠돈다는 정치판도 싫어 오로지 장미 당에 필이 꽂혀 맹목적일 정도로 장미 당을 따르며 장미 가시에 찔려 패혈증으로 죽은 마리아 릴케를 추모하며 사랑할 때마다 피어나는 신품종의 장미가 자라는 장미의 숲으로 가 우리도 장미를 위하여 장미의 사랑을 하는 거다. 어느 별에서 사랑 할 때마다 장미가 피어나는 백 만 송이 장미보다 더 많은 장미가 피는 장미의 숲을 가꾸려고 나도 외쳐보는 것이다. 장미 이즈 러브, 장미 이즈 필링, 가자, 가자, 장미의 숲으로 장미의 여왕, 장미 축제, 장미의 오월, 장미의 계절, 장미의 한 철이란 장미 당을 시간과 공간으로 오월로 제한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것 겨울의 창마다 피어나는 성에꽃도 투명한 장미꽃이다. 신품종이다. 아득한 곳에 피는 상고대도 장미의 숨결로 피어난 것이다. 차디찬 겨울 하늘에 피어난 별도 따뜻한 장미별이다. 장미 이즈 러브, 장미 이즈 필링, 가자, 장미의 숲으로 뭐 이것저것 살펴보고 여기저기 자르고 물어보고 주춤거리느냐. 어떤 재배기술 없이도 장미 당이 되어 사랑할 때마다 장미가 피어나므로 우리의 울력으로 장미의 영토는 점점 넓어져 장미의 나라 장미의 세계 언젠가는 이뤄 장미의 향기 휘날리는 장미의 우주가 될 것이다. 장미 이즈 드림, 장미 이즈 뉴 월드, 장미 이즈 코스모스 가자, 장미의 숲으로 장미가시 같은 장미의 이념에 찔려 흐르는 피를 서로 핥아주다 보면 장미는 끝없이 피어나고 나는 장미뿌리 같은 닻 하나 어느 새 네 깊이 내리고 있을 테니 나마저 너에게 피어난 장미로 행복에 겨워 몸부림 칠 테니 가자, 사랑의 울력으로 장미가 피어나는 장미 숲으로
러브 이즈 로즈, 로즈 이즈 해피, 가자, 장미의 숲으로 장미 숲에 모여든 꽃뱀으로 숨통이 조여 장미의 그늘로 몰락하는 이별의 노래를 불러도 좋으니 사랑은 장미, 장미가 행복인 곳으로, 가자, 가자, 장미의 숲으로
*마광수의 시「가자, 장미여관」 패러디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김왕노 시인 / 모국의 밤
나는 오늘 밤을 모국의 밤이라 부릅니다. 철철 울던 북방여치도 모국어로 웁니다. 졸졸졸 흐르던 물도 모국어로 졸졸졸 거리다 잠들었습니다. 탱자나무하얀 꽃도 모국어로 피고 오늘 하루도 모국어로 저물어야합니다. 모국어로 칭얼거리던 아이도 고목도 스르르 잠들었습니다.
연인은 모국어로 사랑을 속삭이며 모국어에 젖은 입술로 모국의 키스를 합니다. 사랑의 연대는 모국어로 이뤄지고 모국어가 푸른 문장을 펼치며 푸른 하늘마저 펼칩니다. 모국어에 물든 구름이 모국어로 우는 새에게 흘러갑니다.
지금은 세상이 쥐 죽은 듯 조용하나 모국어 속에 잠들어 모국어로 사랑을 속삭이며 몸 뒤척입니다. 소녀는 모국어로 깨어 서툰 편지를 씁니다. 밤은 모국어가 발효하는 시간입니다. 모국어가 분열에 분열을 하는 생명의 시간입니다. 개가 모국어로 짖으며 모국의 어둠을 경계합니다.
모국어는 절제입니다. 모국어는 모국어가 모국어를 낳고 낳은 모국어가 모국어를 낳는 연쇄반응의 열매입니다. 모국어는 김치를 담급니다. 김치는 모국어와 고등어와 김치가 모여 모국의 찜을 만듭니다. 모국어가 불러 나는 왔고 모국어로 걸음마를 익혔고 모국어로 수국 꽃을 부르는 어머니에게 모국어를 배웠습니다.
지금 밤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멀리서 주둔군이 마이 웨이라는 노래를 부르나 그것은 모국어에 대한 결례, 동양의 등불이 우리 꿈이지만 멀지 않아 세상은 모국어로 웃고 떠돌고 놀고 모국어 아래서 꽃잠 듭니다. 모국어가 헝클어진 세상을 올올이 다듬어 줍니다. 꽃 같은 모국어, 씨앗 같은 모국어, 마음에 등불인 모국어, 혁명의 불씨인 모국어
미안하지만 오늘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모국어라는 물고기가 있어 세상을 수면처럼 끝없이 쳐대며 미친 듯 산란하고 생명의 비린내가 진동해도 좋습니다. 모국어가 신화의 물고기가 되어도 좋습니다. 방생한 모국어가 물을 걷어차고 붕새로 날아올라도, 불새로 진화해도 좋습니다.
나는 모국어와 함께 잠듭니다. 모국어가 푸른 꿈길을 내주고 모국어가 주렁주렁 익어가는 꿈속에서 장딴지의 푸른 힘을 얻어 옵니다. 지금은 모국어의 밤입니다. 240 억 광년 거리에서 별을 밟아온 푸른 머리카락과 깊은 눈동자, 안드로메다 여인을 가만히 모국어로 부르다 잠듭니다. 그 여자도, 은하수, 하얀 쪽배, 해, 달, 별, 엄지, 검지 모국어를 익히다가 잠들기 바랍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세상 모든 밤은 우리 모국어로 잠들고 우리 모국어로 깨어나야 합니다. 그것이 모국의 꿈이고 모국어의 꿈입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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