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권정일 시인 / 무의식

파스칼바이런 2022. 12. 23. 05:00

권정일 시인 / 무의식

 

 

 납작하게 내리는 비

 하늘색사람 땅색사람 나무색사람 물색사람 모든 사람처럼 내리는 비는 젠가 게임을 한다

 숭숭 뚫린 육면체의 마음을 꺼내가며

 실감 없이, 실감나게

 입체적으로

 엇갈려 쌓은 아슬아슬한 균열의 부조들

 젠가

 젠가

 

 자세하게 내리면서 주룩주룩 무너지면서

 비는 이미지의 도플갱어

 아는 비와 모르는 우산 모르는 비와 아는 우산이

 폭풍우 속에서 절대음감으로 만날 때

 빗속에서 사람들은 너무 오래 태어나 빗물 가득히

 

 강수량만으로 먼 곳까지 닿고 싶지는 않아 어디엔가는 반드시 갈림길이 나오고 그곳이 새로운 모서리라고 생각해

 우산을 접었다 폈다 접었다 펴면 물방울들이 아래로 떨어졌다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것은 휘파람을 배우는 일과도 같았다

 

 휘파람을 그어 비발자국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몸시를 쓰다가 제 몸 안에 구겨 넣지 못한 납작한 비의 쓸쓸함을 새기고 싶어

그러면 소용돌이무늬는 동글동글한 우군이 될 거야

 

휘파람은 발소리를 가두는 공동경비구역

아마도 팔 다리가 돋기 이전 목도리를 펼치고 나온 도마뱀시를?

 노동하면 낯설어질까

 

 목도리를 펼쳐야 목도리도마뱀은 목도리도마뱀이 되듯이

 

 시는 시처럼 생겨야 하고 사막은 사막처럼 생겨야 하고 사과는 사과처럼 처럼 처럼처럼…… 생겨야 한다고 선생님이 그랬어,

 선생님이 너무 많아 시가 가끔 죽기도 해(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는 시처럼 생기지 않아도 되고 사과는 사과처럼 생기지 않아도 되고 사막은 사막처럼 생기지 않아도 되고 나는 나처럼 생기지 않아도 되고

 

 목격되지 않는 나는 내가 아니고 전체야

 행여, 천진난만할까 두려운 내가 나처럼 있을까

 빗속이여서 안녕

 이 두근거림은 뭐지?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권정일 시인

1961년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 199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되어 등단. 2003년에는 국제사화집 『숲은 길을 열고』 발간. 시집으로 『마지막 주유소』와 『수상한 비행법』, 『양들의 저녁이 왔다』와  산문집 『치유의 음악』이 있음. 2009년 부산 작가상 수상. 2011년 제1회 김구용 문학상, 2019년 제39회 이주홍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