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석균 시인 / 어치의 도토리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3. 05:00

최석균 시인 / 어치의 도토리

 

 

저장용 도토리를 입 안 가득 물고 와

나뭇가지나 땅속에 숨겨두는 새

부지런히 잘 우는 새

 

어치는 종종

숨겨둔 도토리를 잊고는

소리를 바꿔가며 운다고 한다

 

어치 울음이 깔릴 즈음 황매산 비알엔

땔나무 한 단이고, 감자 한 바구니 들고

숨넘어갈 뻔한 가슴을 몇 번이고 눌러서 재운

낮과 밤의 그을음이 얼룩져 있다

 

종합검진 한 번 안 받고

암 진단 받자마자 산으로 날아가신 큰 이모

장롱 속에서 오래 숨 쉬던 통장 몇 개가

여남은 평 그늘을 드리웠다

 

그늘에 앉아 잠시 귀 기울이면

도토리를 물고 와 꼬깃꼬깃 숨겨놓고

이리 아파서 울고 저리 아파서 우는

늙은 새소리가 들린다

 

시집『유리창 한 장의 햇살』2019 천년의시작

 

 


 

 

최석균 시인 / 집 보러 다니던 날의 허공

 

 

떠돌이 거미 한 마리가 접근하자

집을 거의 다 지어가던 거미가 일을 멈추고

잽싸게 맨 가운데로 가서

탁 버티고 노려보며 집을 흔들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고함소리가 떨어졌다

접근하던 거미가 물러났다가 다가오니

또 똥줄 빠지게 중심으로 달려가

온몸으로 쉿쉭 집을 굴렀다

팽팽하던 햇살과 바람이 맥없이 휘었다

 

쉬었다 가려고 둘러본 숨찬 길목이었다

허공의 무게에 일그러진 방 한 칸

끊긴 연실처럼 내려앉고 있었다

 

줄을 타고 흔들지 못하는 거미는

현기증을 끌며 지평선을 넘어간다

끈적거리는 속을 실로 뽑지 못하고

노을과 어둠으로 짠 집에 훌쭉한 짐을 푼다

 

-시집 <수담(手談)>에서

 

 


 

최석균 시인

경남 합천에서 출생. 2004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 『배롱나무 근처』 『手談』 『유리창 한 장의 햇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