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구효경 시인 / 스타시몬*

파스칼바이런 2022. 12. 25. 05:00

구효경 시인 / 스타시몬*

 

  

주인공들이 무대를 떠난 후에도 난 극을 벗어나지 않았다.

짙푸른 관중 속의 슬픈 환호와 시퍼런 박수소리

간헐적인 울음소리, 무대로 불어오는 서풍의 한기를 느끼며

난 그대들의 코러스에 육체를 던져 귀를 기울였지.

인물이 퇴장하고 이야기가 끝난다

이야기가 끝나고 인물이 퇴장한다.

나는 내 인생 어느 지점에도 등장한 적이 없었다.

주인공들이 퇴장한 후에야 어둡던 모습을 밝힌 불청객이다.

트로이 성의 헤카베 왕비 역할을 맡았던 배우가 올랐던**

그 자리에 이름을 덧대고 있다.

 

퇴거와 함락뿐이던 일생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골목길에서

낡은 요를 깔고 잠들었던 나날들이다.

도망치고 도망쳐온 풀숲에서 서벅서벅한 칡넝쿨과 씀바귀를 먹으며

비참하게 살아온 내력으로 새로운 실험극의 주인공이 되련다.

여태껏 한 번도 등장한 적 없던 주인공,

'승전고를 울려라, 원수들아!

망한 트로이여! 이리로 기어오너라!'

그악스러운 함성으로 함락한 성의 배경을 배회한다.

'아폴론 신을 찬양하라! 신을 찬양하라!'

물러서 퇴장하지 않는 찰나의 비렁뱅이 주연,

전쟁 통에 어디 있었는지 어디서 누구의 명령을 받아 왔는지

알 수 없는 역할의 누더기 주연이다.

 

이 주연극의 실험성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누가 나의 이름을 기억하길 바랐다는 소회를 밝히고

코러스의 아름다운 노래들을 떠올린다.

부윰하게 흐려진 노랫말과 떠도는 것들의 유희

다음 번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할게요

약속처럼 뱉은 마지막 장도 끝나고

완전히 폐막한 장막 뒤에서

스타시몬에 취한 육신을 가누는 비렁뱅이 주연은

다른 무대로 뚜벅뚜벅 걸어간다

아슴푸레한 저녁 빈민가의 비렁뱅이 주연이다.

비극은 아무도 나에게 이름을 묻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내가 두 번째 탄생한 나의 희곡에서 나는 영웅이다.

잘 웃는 아이와 잘 우는 여자가 객석에서 날 보고 있다.

 

*스타시몬 :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 등장인물이 퇴장한 후 그 시간을 메우기 위해 이미 전개됐거나 앞으로 전개될 사건과 관련된 코러스 노래를 부르는 장면.

** 비극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헤카베는 스타시몬 때에도 무대에서 퇴장하지 않는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9월호 발표​

 

 


 

구효경 시인

1987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 전남과학대학 화훼원예과 중퇴. 2014년 제3회 웹진 《시인광장》 新人賞 公募에 〈쇼팽의 푸른 노트와 벙어리 가수의 서가〉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현재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소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