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송희 시인 /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2. 12. 29. 05:00
송희 시인 / 지구를 가지고 흥정하다

송희 시인 / 옥수수 껍질을 벗기며

 

 

옥수수 껍질을 벗기는데

울컥, 영락없이 아버지를 감쌌던 수의다

버스럭버스럭 아직 빳빳하다

덥수룩한 머리칼에 실바람이 촉촉하다

아니 아 버 지

여태 여기 계셨어요

푹 삶아 낱낱이 발라 먹고 뜯어 먹고도

무얼 더 빼 먹을 게 있다고

못 가시게 붙들고 있었나

“그래도 제 이빨이 좋은 거여” 손사래를 치시어

모른 척 금니 하나 끼워 드리지 못했다

태워 가는 일이 사는 일이라 하시며

부서진 이를 빼내고

꾹 눌러 두신 불뚝심지를 꺼낸다

타다 만 불씨도 없이 흐옇다

제발 나에게서 도망치세요 아버지

억지로 밀어 넣는다

이제야 내게서 안녕

 

시집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2022. 천년의시작

 

 


 

 

송희 시인 / 물먹는 하마

 

 

복수腹水 가득 찬 하마가 쓰레기통 속에 꼬꾸라져 있다

사촌들인지 모양새가 비슷하다

빨강 고무장갑이 수거함에 처박힌 하마들을 정리한다

이놈들은 미리 다 게우고 왔네

샅샅이 뒤지다 뒤통수를 내리친다

컥 남은 오물을 토해 낸다

뱃구레도 작고만 뭘 처먹겠다고 잠입을 해 허기는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어딨어요 이게 전부라구요

혼자 한 짓이라니까요

어느 집이나 하마 한 마리씩 키우는 건 다 알아 임마

 

새끼 하마를 분양받아 그 집 장롱 속에 침투시켰다

양복 주머니랑 베갯머리 눅눅한 낌새를

개구리가 벌레 채듯 낚는다 해서 시도한 것이다

하마에게는 물관이 있다

곰팡이 좀벌레 박쥐 아지트까지 매설되었다

신속하게 끝내야 할 텐데 하필 계속 폭염이다

이러다간 결정적 악취를 뽑아내지 못한다

어린놈을 보냈더니 쉽게 쫓겨났다

물만 먹었다

 

시집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2022. 천년의시작

 

 


 

송희(宋熹) 시인

1957년 전북 전주 출생. 1996년 『자유문학』 등단. 시집 『탱자가시로 묻다』 『설레인다 나는, 썩음에 대해』 『고래 심줄을 당겨 봤니』. 가족 치유 명상집 『사랑한다 아가야!』 등. 2003년 전북시인상, 전북문학상 수상. 前 전북시인협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