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명숙 시인 / 비와 눈발 외 1편
기명숙 시인 / 비와 눈발
빗소리보다 한 옥타브 낮고 눈발보다 고음 물음표보다 공손하고 느낌표보다 솔직한 아토피처럼 습관적인 비와 눈발 사이 오래된 습속 수면제 녹는 소리
눈꺼풀이 닫히며 헤어진 애인의 발자국 소리 슬픔 툭툭 털어 우산을 접고 비와 눈발 사이를 떠도는 터무니없이 당신을 용서하고픈 화해의 감정 투명한 물방울로 다녀간 그 사이
기명숙 시인 / 주스
사과의 시린 이빨과 토마토 배꼽을 도려내자 풋내가 진동한다 첨언하듯 떨어뜨리는 몇 방울의 꿀. 과일과 꿀이 불화할 때가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회전과 와류를 타고 타액이 흥건해질 때까지 목을 조른다. 누군가의 삶을 휘젓고 교란시킬 때의 악취미는 오래된 인류사 굉음과 함께 흔들리고 깨지고 섞이다가 혈행처럼 고요해지는 한 잔의 주스 사과도 토마토도 아닌 질감이 사라진 문장만 가득하다 모터가 돌아 갈수록 통사 반복은 심드렁, 종지부는 생략되지만 눈과 혓바닥까지 잘려 나간 주스의 문체는 언제나
핏빛
- 시집 『몸 밖의 안부를 묻다』, 모악,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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