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우식 시인 / 설야서정(雪夜抒情)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3. 05:00

강우식 시인 / 설야서정(雪夜抒情)

 

 

저승과 이승을 건네이는

얕은 기침 소리 하나 없이

눈이 내린다.

 

오랜 기다림 속에 견디어 오던

사랑도

恨으로 남고

 

우리가 젊어서 눈물로 흘려버린 유서 한 장 만큼한

죽음같이 가벼운 부피로

하이얀 눈이 내린다

 

아!

눈 내리는 밤이면

시렁만큼 높은 곳에 마련되었을

관 속으로 나들이 갈

무명옷 한 벌과

 

저승의 어느 길목에 가더라도

하얗게 살

내 가시내의 모습이 떠오른다

 

 


 

 

강우식 시인 / 노인일기2 -丈母喪

 

 

장모 이 아무개 여사는 85세까지 혼자 살다가 돌아가셨다. 외아들도 시집간 두 딸도 나름대로 모시지 못한 까닭이 있겠지만 나는 장모의 죽음을 자살이라고 본다. 불효스럽게도 딸들은 어머니를 뵈올 때마다 이제 살 만큼 살았으니 한 발 먼저 간 남편 곁으로 가시라고 틈만 있으면 강요했고 마침내 장모는 단식 아닌 단식을 시작하여 체중 25kg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살아 있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던 저녁 일일드라마 ‘보고 또 보고’의 끝도 못 보고 말았다. 혼자 사는 외로움의 그 지독한 깊이를 누가 헤일 수 있으랴. 나는 입관시 미이라 같은 그 몸뚱어리가 고독으로 찌들고 안이 막혔음을 똑똑히 보았다.

 

장례 후 장모의 방에는

누가 먹으라는 것인지 정성스레 담근

노오란 모과주가

장롱 속에 한 병 있었다

 

 


 

강우식 시인

1941년 강원도 주문진에서 출생. 성균관대 국문과 졸업, 문학박사. 1966년《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별』 『사행시초』 『벽, 살아가는 슬픔』 『사행시초 2』 등 다수. 제20회 현대문학상, 제6회 펜클럽문학상, 제34회 월탄문학상 등을 수상. 성균관 대학교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