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구 시인 / 거울 속으로 난 길 외 1편
김인구 시인 / 거울 속으로 난 길
욕실거울을 닦는데 거울 한 쪽이 닳아있다 거울도 외로웠을까 드나드는 사람들의 고정된 눈길을 따라 비스듬히 기울어진 길을 내었다. 아무나 볼 수 있지만 함부로 들여다 볼 수 없는 저만의 길을 내놓은 거울의 길속엔 오랜 슬픔으로 다독여진 깊은 상처가 웅크리고 있다. 거울속의 길엔 볕이 들지 않는다 응달 속, 햇볕을 담지 못한 여린 잎맥 사이로 배추흰나비 애벌레 한 마리 숨어 든다 슬픔의 모퉁이만 갉아 먹고 자란 애벌레의 체액에는 한껏 슬픔을 이겨낸 쓸쓸함이 들어앉아 시간의 마디를 채워나간다 거울은 빠짐없이 그 시간의 마디를 닮은 길을 내게 보여준다 생의 무엇이 되었건 간에 정점에 닿아본 적이 있는 것들이란 가벼이 기억의 회로를 통과하지 않는다는 듯 거울 속으로 난 길들은 모두 닮은 예각을 지니고 있다
마악 허물을 벗은 배추흰나비 한 마리 날개를 퍼덕여 거울 밖으로 날아 오른다
김인구 시인 / 경계를 잃어버린 달에 대하여
내 몸에서 달의 기울기가 사라지더니 나는 점점 뚱뚱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 안으로 기어들어와 내 중앙의 변두리를 차지하더니 급기야 나는 뚱뚱한 발목과 뚱뚱한 허리를 가지고 기우뚱거리며 걷기 시작 했다 달이 빠져 나간 다음 나의 가장 깊숙하고도 내밀한 그곳에서 진행된 일들은 나의 그 어디쯤에 서 있던 기울기의 경계를 잃어 버렸을 것이다. 경계를 잃어버린 나침반들이 사방 그 어딘가에 자신의 생애를 눕힐 어둑한 공간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반생을 뒤척이고 다독인 노곤한 갈지자를 어딘가에 가두거나 고착시킬 비밀의 방이 필요 했을 게다. 무사히 안착된 그들의 생애가 도도하게 내 중심부에서 뿌리를 내리고 둥글게 가지의 순을 치고 내며 자리 잡은 곳.내 중앙의 변두리에서 그들은 내게 뚱뚱한 사물의 힘을 각인시키기 위해 날마다 팽창하려는 세포의 본질에 몸을 내 맡긴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조금씩 더 나를 뚱뚱하게 만드는 작업에 열중했다. 뚱뚱한 것을 우롱하는 온갖 매체들을 자신의 영역으로 구겨 넣으며 이 땅의 제3의 성으로 살아남았을 게다. 내 안에서 빠져 나간 그 많은 달들의 표정들이 하늘로 올라가 푸른 달빛을 낳았다. 나는 조금씩 뚱뚱해져 가면서 내 안의 달들을 꺼내보는 버릇을 지니게 되었다. 마녀도 성녀도 없는 그 달 속에는 달의 기울기가 사라진 후 밤낮없이 희고 붉은 꽃숭어리들이 피고 졌다. 조금씩 더 뚱뚱해지는 사물들의 힘을 작품처럼 만들어 내며 오늘도 어제 보다 조금 더 뚱뚱해진 모가지로 서둘러 사라지려는 나를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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