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강나루 시인 / 그늘에서 그늘 사이

파스칼바이런 2023. 1. 7. 05:00

강나루 시인 / 그늘에서 그늘 사이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어스름한 새벽,

희미한 가로등이 비추는 골목

밤새 내다버린

폐지며 종이박스

노인 하나 쓰레기장을 뒤진다

평생 가난의 땟국 온 몸에 걸치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목숨

남들은 편안하게 잘도 살아가는

문명의 그늘에서

먹고 버린 욕망의 껍질을 뒤지며

정의도 복지도 먼 나라 일일뿐

병들어 누운 아내의 기침소리와

고통스러워하는 신음소리만 들릴 뿐

약값도 안 되는 폐지를 찾아

먹이를 찾는 길거리 고양이처럼

새벽 그늘에서부터 밤 그늘까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고행

이것은 수행도 그 무엇도 아니다

리어카 가득 넘치는 폐지의 무게가

노인의 등을 짓눌러도

그 무게만이 노인의 희망이다

날이 밝아도 걷히지 않는 노인의 그늘

무더운 여름에도 한기가 엄습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10월호 발표

 


 

강나루 시인

1989년 서울에서 출생. 2020년 《시와사람》 겨울호로 등단. 시집 『감자가 눈을 뜰 때』, 동시집 『백화점에 여우가 나타났어요』, 에세이집 『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