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상혁 시인 / 토르소 애인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15. 05:00

김상혁 시인 / 토르소 애인

 

 

 너를 떠난다면 나는 많은 다리를 낳는 사람이 되고 그것들은 무더운 계절 내내 방 안을 뛰게 될 것이다 너의 어깨를 흔들며 약속했다 다신 내 왼손과 오른손 사이에 나를 노엽게 하려는 그 어떤 얼굴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또 수많은 얼굴들이 창밖 가지에 매달려 흔들리고 있다 구멍마다에 날벌레를 키우며 겨울을 향해 잎사귀들을 날리고 있다 눈이 비스듬히 내리는 언덕의 낙목(落木)이 담긴 화폭에 단 한 장의 휘날리는 활엽을 그려 넣으려고, 그것을 구경하는 노년의 눈빛을 초록빛으로 칠하려고

 

 너를 떠난다면 나는 다리를 낳는 사람이 되고 그것들은 추운 계절 방 안에서 가랑이를 벌린 채 떨게 될 것이다 너의 어깨를 흔들며 약속했다 다신 나의 양손으로 나를 내려 보려는 그 어떤 얼굴도 쥐지 않을 것이다 차가운 기후들의 날카로운 사이를 몇십 년 동안 걸어온 낡은 사람들은 두 손에 신발을 들고 너의 문 앞에서 단 하나의 발을 구걸하겠지 그들은 발가락 사이 하얗게 슬어 있는 알들을 더러운 신발 속에 턴다 걸을 때마다 곤충 소리가 들려야 했던, 언덕 위에서 여름을 향해 구르던 날들이 거절당할 것이다

 

-시집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민음사, 2013년

 

 


 

 

김상혁 시인 / 나의 여름 속을 걷는 사람에게

 

 

 여름으로 오는 길에 너는 죽은 새, 봄의 검은 웅덩이, 깨진 울타리의 조각들, 다음해 봄까지 잠들어 있으려는 자의 조용한 손을 밟으며 왔다. 그렇지만 지겹다! 새든, 봄이든, 울타리 속 꿈이든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여름에서 도망치는 길에 너는 죽은 새를 더욱 뭉갠 일, 깨진 웅덩이와 울타리를 다시 깨뜨린 일, 꿈속의 비명을 꿈 바깥으로 꺼낸 일을 괴로워한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사이 유령이 있다면 너는 삶과 유령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그러기에 넌 웃음이 많다.....

 

 너무 사랑이 많다. 그렇지만 지겹다! 여름이 풀을 키우고, 풀이 끝없이 퍼지다가 너의 생각을 뒤덮고, 그러다 불붙은 생각이 기쁨이 되었다가 결국 우리의 꿈을 걷잡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우리 그릇에 똑같이 밥을 채우는 것이 다.....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그렇지만 네가 밟은 것, 밟아서 더 깨뜨린 것, 더 깨뜨려서 흩어진 것, 그런 지겨운 것이 죽은 새, 웅덩이, 부서진 울타리, 뒹구는 손을 덮어준다. 풀과 꿈을 키워준다. 다가올 여름과 지나갈 여름 사이 슬픔이 있다면 너는 오늘과 슬픔 사이에 있고 싶다.

 

 하지만 넌 너무 기쁨이 많다. 그런 너의 마음은 나만 안다.

 

 


 

김상혁 시인

1979년 서울에서 출생. 2009년 《세계의 문학》신인상 〈정체〉外 7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이 집에서 슬픔은 안 된다』 『다만 이야기가 남았네』 『슬픔 비슷한 것은 눈물이 되지 않는 시간』이 있음. 산문집 <만화는 사랑하고 정의롭고> 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