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장서영 시인 / 춘작보희도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17. 05:00

장서영 시인 / 춘작보희도

 

 

까치 세 마리 봄 가지 위에 앉아 있고

한 마리는 다른 곳으로 날아간다

 

몇 겹 서리 지난 후, 꽃나무 위 덕지덕지 붙어 있던

분홍색 웃음이

들썩이며 다가온다고 큐레이터는 말한다

 

나는 그때 펼쳐 보일 수 없었던 나의 정원을 떠올린다

뒤틀린 가지에 잎들이 왁자하고

몽글몽글 봉오리 맺혀 있는데도

나비 한 마리 날아오지 않던 밀폐된 정원

 

외따로 날아간 새 한 마리는

당신 안에서만 살고

도도한 봄, 울음이 된 내가 시들어 가고 있다

당신과 함께 자라던 봄

내 오래된 매화나무가 기억이나 할까

 

돋아나는 내 부끄러움과 고집으로 기다림은 피었다 지고 피었다 지고,

 

새라는 말이 사이가 되어

한 뼘 더 멀어진 오후

나만 그림을 오독하고 있다

 

* 春鵲報喜圖: 단원 김홍도의 그림,

 

계간 『시와 소금』 2021년 가을호 발표

 

 


 

 

장서영 시인 / 핀셋의 프레임

 

 

무엇이든 집어내고 스스로를 옹호한다. 달빛이 흐르는 모래밭에 도요새가 서 있다. 나는 해변의 끝에

서 새의 그림자를 본다. 모래에 발자국이 생기는 순간 새가 움직일 것 같아 나는 잠시 불안하다. 해변에

는 아직 감동이 없고 바다 밖에는 뚜렷함이 없는데 밀물과 썰물 사이만큼 닿을 수 없는 새와 나의 관계

 

새의 세계에서 새는 우아하게 움직인다

새는 나의 관음을 쪼아댄다 나에겐 이데올로기 따윈 없으므로 그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중이다

 

모래와 모래가 부딪치는 소리는 민감하다 새는 무심하지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서 환상을 쏙 빼먹는다

나는 비로소 내 존재를 확인한다 믿기지 않겠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나의 껍데기, 그러나 새는 빈 것들엔

관심이 없다

새는 한번이라도 껍데기 속 나의 표정을 지켜 본 적 있을까?

뒤돌아보니 허무가 거대한 핀셋처럼 입을 쫙 벌리고 있다

 

 


 

 

장서영 시인 / 제비나비에 대한 탐구

 

 

나는 탐색한다 시시때때로

그 꽃에 끌려다니는 것

끌려다니는 줄 알면서 끌려가는 것

탐색은 너를 향한 날갯짓이고

미세한 흔들림으로부터 시작을 예고한다

 

황록 날개에 대한 기원을 초승달에게 묻는다

달은 말이 없고 은은한 무늬만 내려 보낸다

더듬이와 날개에 대한 진화적 고찰은

신생대와 중생대 동굴에 대한 조사로 연결된다고 하는데

생물의 연대는 어떻게 감각할 수 있는가

 

나는 실체를 기다린다 은일함으로

같은 길을 왕복하는

파장의 반복은 음역과 같은 개념

의미들이 번식하는 자리에서 꿈틀대는 날갯짓

어깻죽지의 가려움이 논쟁을 불러오기도 한다

 

어느 순간 호접몽이 구성되면

대담한 필묘법으로 동일화가 완성된다

내가 발을 모으고 꽃 위에 앉아 있다

흠모하듯 향기에 취해 있는 내 모습을 부연설명 할 필요는 없다

 

긴장하고 경계하는 동안

날개 찢긴 파초에 앉아 나비의 이전과 이후를 가늠해 본다

 

 


 

 

장서영 시인 / 실적 그래프

 

 

게시판에 죽순처럼 솟은 막대그래프

식물성은 결코 아니에요

 

저 탁월한 발기 능력, 내게만 없어요

 

오늘 바닥을 이해하는 방법에 대해 설파해볼까요

밑을 끝까지 보여주는 집요함에 대해 놀란 척을 해볼까요

 

집합은 흔하고 비난은 더 흔하죠

바닥을 치는 오후

쓸데없이 중력은 나와 가까워요

 

때로 화살이 되기도 하고

때론 도미노가 되기도 하죠

나는 화살표에 매달리다가 도미노와 자주 타협하죠

 

막대를 세로로 이어붙이면

절벽 위 나만의 지점이 탄생하고

막대를 옆으로 이어붙이면

리듬을 타는 신명이 만들어져요

 

제발 초록색으로 그래프를 그려주세요

검정색엔 숨 쉴 틈이 하나도 없어요

 

 


 

 

장서영 시인 / 명함의 공식

 

 

0.01 밀리미터의 두께로 살아가는 낯선 이웃들 공동체를 꿈꾸고 있어요

 

사각의 표정으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위치와 신분이 노출되고 서로의 좌표가 확인되어도

친밀을 꿈꾸진 않아요

 

나는 좋은 근린입니까? 나에게 질문하죠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서성이다보면 그리운 이름 하나

받기만 하고줄 수 없던 장면이 떠올라요

 

어디서 통성명했을까 추론을 하다보면

나의 기획은 조금씩 선명해져요

내 표정이 더 투명해질 때

관계와 관계가 명징해지고 가능과 불가능이 경계를 드러내죠

 

소속이 있다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구속과 간절함을 동시에 품고 있으니까요

월요일 오전 10시, 텅 빈 공원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지갑에 두둑한 나의 명함은 늘 예측 불가능이었고

당신의 명함은 늘 구체화였죠

 

0.01 밀리미터의 두께로 살아가는

낯선 이웃들 속

나는 사각의 표정을 조금씩 버리고 있어요

 

2020년 《열린시학》 신인상 등단시

 

 


 

 

장서영 시인 / 허밍에 대한 안부

 

 

대답은 늘 후렴구에 멈추어 있었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들

끌어당겨도 들리지 않는 소리들

굳은 표정에 반사경 하나 붙여야 했을까

 

당신과 나눌 수 있는 악수는 멀어졌다

젖어 있던 손바닥의 온기가 기억나지 않는다

어우러지지 못한 것들을 맞잡은

지금의 눈빛은 현재형일까, 과거형일까

 

나는 미루어져 증폭된 안부

당신은 각색된 감정

 

거울 속 당신은 차갑고 거울 밖 당신은 불타고 있었다

내가 반사되어 불쑥 끼어들어도 끝내 섞이지 못했다

 

우리는 불안했고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데리고 왔다

당신은 불안을 막기 위해 거울을 자주 닦았다

 

나는 매번 한걸음 뒤에 들어가거나

너무 한쪽으로 숨었던 건 아닐까?  

 

당신은 흥얼거림 같은 허밍

딱 그만큼만 실감으로 떠돌았다

그때쯤 거울 속의 당신이 찬찬이 보이기 시작했다

 

계간 『시산맥』 2021년 여름호 발표

 

 


 

 

장서영 시인 / 음지식물

 

 

햇빛 없이도 잘 자랄 거야, 화분을 건네고 떠날 때 당신이 남긴 말이다

나의 음지까지 모두 알고 있다는 듯

처음부터 내가 음지였다는 듯

그날 이후 어디까지가 나의 음지였는지

언제까지가 나의 양지였는지

가난한 동네의 저녁처럼 어두워져서 나는 궁금해졌다

 

한없이 싱싱한 이파리들

물주는 시간을 자주 잊어버렸다

그런데도 잘 자라고 잠도 잘 잤다

내게 꽃을 보여주며

어둠을 흔들며

나를 조롱하고 조종했다

 

음지에서 양지로 건너갈 때 양지에서 음지로 옮겨갈 때

당신은 언제나 난간 같은 표정이었다

난간과 난간 사이, 숨 막히게 어둠이 가득 차 있는데

다행인 건 내 독백을 과식하고도 탈이 나지 않는 거다

 

그동안 쏟아 부은 혼잣말을 우적우적 주워 먹고도

그늘을 벗어나려는 몸짓이 단 한 번도 없었다니

나는 패배자였다

 

통증 있는 자리마다 어둠이 어둠을 게워냈다

눈 감으면 단 하나의 별이 왜 그렇게 선명하게 보이는 건지

여름에 시작된 나의 독백은 여름 속에서만 살았다

 

GNN 경북방송 2021년 2월 발표

 

 


 

장서영 시인

2020년 《열린시학》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낭송가. 동화작가로도 활약. ‘춤추는 작은 불꽃’이라는 동화집을 출판. 글쓰기, 논술교사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음. 현재는 백양문학회 아동문학연구회에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