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승일 시인(과천) / 지옥

파스칼바이런 2023. 1. 21. 05:00

김승일 시인(과천) / 지옥

 

 

 내가 시인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였으면 좋겠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다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우리 둘의 일생을 촬영했으면 좋겠다 둘의 철학은 구별된다 너는 나의 태도를 나는 너의 생활을 사랑한다 너와 나는 지옥이 무엇인지에 대해 종종 의견을 나눈다 지옥은 내가 아직 겪 어보지 않은 곳이다 내 관점이고 지옥은 이미 겪은 괴로움을 겪는 곳이 다 네 관점이다 내가 맞다 내가 지옥에 가면 나는 거기가 지옥이 아니라 고 할 것이고 네가 옆에 있다면 너는 여기가 지옥이 맞다고 할 것이다 아 니야 여기보다 더 괴로운 데가 있을 거야 너는 지옥에서도 내 해석을 좋 아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는

 

 둘 중 하나가 병에 걸려 먼저 죽으면 다큐멘터리 감독이 편집을 시작했 으면 좋겠다 은근슬쩍 한쪽 편을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시름시 름 앓고 있는 나의 거처로 영상 다큐멘터리 감독이 찾아온 것이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잠시 고심하다가 손으로 땅을 짚었다 천천히 상반신을 일으켜 세우고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 았다 고르기아스, 난 항상 왜 네가 누구랑 있는지가 궁금하지? 내 앞에는 아테네의 다른 모든 시민들처럼 은근슬쩍 너의 편만 들어왔던 감독님이 서 계시다 너는 지옥에서 누구랑 있나?

 

-시집 <여기까지 인용하세요>에서

 

 


 

김승일 시인(과천)

1987년 경기도 과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극작과 졸업.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화연구학과 수료. 2009년 현대문학 신인 추천으로 등단. <는>동인. 시집 <에듀케이션> <여기까지 인용하세요>. 2016년 현대시학 작품상 시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