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홍경나 시인 / 그믐치 외 3편

파스칼바이런 2023. 1. 26. 05:00

홍경나 시인 / 그믐치

 

 

 사흘장을 치고 밀양 큰고모 부산 작은아버지 새나리 막내고모 모두 돌아갔습니다 엄마와 아빠 동생들은 건넌방에 나는 할머니와 안방에서 잠을 잤는데요 불현듯 오줌이 마려워 잠을 깼습니다 희읍스레 비치는 뜨물빛 장지문을 밀고 대청으로 나왔을 때 뒤울이 한 올 오스스 뺨을 핥더니 왈칵 머리채를 낚아챘습니다 온몸이 처마 고드름처럼 얼어붙는 것 같았는데요 새로 산 내 운동화 한 짝을 당실당실 신고 가서는 밤중에 남은 신 한 짝을 마저 가지러 온다는 냇그랑 물귀신이며 두억시니 손말명 호구만명 꽃귀신 간을 파먹는다는 애장터 백여시까지 웅게웅게 모여 있다가 달라붙는 것 같았습니다 저승차사 해원맥 이승차사 이덕춘 강림차사 이도령이 저승길 든 할아버지서껀 너도 가자고 데리러 온 것 같았습니다 오줌도 못 누고 벼락같이 방으로 뛰어 들어와 솜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긴 채 눈물콧물 범벅이 됐는데요 할머니가 놋요강을 방에 들이며 크렁크렁 젖은 목소리를 했습니다 악아 악아, 고마 울거라 니 할배 댕기갔는갑다 선딩이 니캉 정 띤다꼬 니 할배가 댕기간기라

 

 그렇게 왔던 할아버지는 다시는 오지 않았습니다 할머니 흰 고무신 벗어논 댓돌에도 조촘조촘 자최눈 쌓이는 안마당에도 볕뉘 같은 발자국 하나 남기지 않고 다녀간 뒤론 샌날도 진날도 무싯날도 오지 않았습니다 딱 한번 다녀가던 그날은 그믐치가 할아버지 오실 길 가실 길 모두 지울 듯 새벽까지 사물사물 내렸는데요

 

-시집 『초승밥』 2022년 『현대시학』

 

 


 

 

홍경나 시인 / 고령장(高靈場)

 

 

 자드락밭 배차 열무시 솎고 개똥갈이 남수밭 머구잎사구 호박잎사구 푸지게 해다 간종간종 삭훈 콩이파리 깻이파리 포옥 삶은 무씨레기 나물거리 좨기 지어 팔던 개진(開津) 사는 경분할매와 녹두며 미물 뺄간 팥에 재팥 불콩 제비콩 자갈콩 알종다리콩 오목조목 씨갑시 벌여놓고 들지름 삼씨지름 아주까리지름 쌀누룩 밀누룩 띄워 팔던 운수(雲水) 사는 금이할매는 4일 9일 날마중 만나는 40년 난전 동무

 

 금이할매 서울 아들네로 이사하는 날 국말이 밥이라도 한 술 묵자고 잡아끄는 북두(北斗)갈쿠리 같은 경분할매 손을 한사코 뿌리치는데 돈하지 만다꼬 이카노 부리나케 담아 건네는 정구지 석 단을 기어이 마다하고 저만치 멀어지는데

 

 검정 비닐봉다릴 들고 장승백이 풍동골 벅수처럼 남은 경분할매 왁자하게 오가는 얼른얼른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 서서 목 짧은 강생이 겻섬 넘바다보드키 서서 인자 운제나 볼끼라꼬 인자 또 운제나 볼끼라꼬 개신개신 곱립든 사람맨치 자꼬 갈라지는 소리를 외워 쌓는데

 

-시집 『초승밥』 2022년 『현대시학』

 

 


 

 

홍경나 시인 / 내력

 

 

을해년에 났다는 큰고모 이름은 을생

정축생 영천 작은고모의 이름은 정생

평생 한량이셨다는

할아버지가 둥개둥개 업고 다녔다는

기생할매 이름은 봉지

봉지나 봉지 꽃봉지 기생할매가 낳았다는

첩딸 한 번도 본 적 없는

막내고모의 이름은 애생(愛生)

첫딸을 낳고

젊은 아버지가 삼백 삼천 공들여 지었다는

내 이름은 경나

각시볼락 등모란 며느리주머니 며늘취

이름도 숱한 금낭화처럼

나야 철영아 영준아로 불리던

우리 엄마의 이름은 종수(宗守)

 

-시집 『초승밥』 2022년 『현대시학』

 

 


 

 

홍경나 시인 / 그 비린 것 한 토막

 

 

비린 것 한 토막이 먹고 싶다 하셨네

할머니는 즐기던 녹두죽도 근 가웃 사태살 폭 고아

베밥수건 밭여 끓인 장국죽도

곱게 쌀알 갈아 홀홀하게 익힌 무리죽도 응이[薏苡]도

기어이 넘기지 못했네

음식 솜씨 짭찔받던 그니는

뜬숯 피운 풍로에 새옹밥 짓고

적쇠 걸어 간갈치 한 토막 노랑노랑 구워내셨네

솔솔 김이 오르는 이밥 위에 얹어주던

그니는 잔가시 지느러미 살 발라 먹고

간지숟가락에 뜬 이밥 위에 실한 살점 골라 얹어주셨네

그니가 아, 하면 나는 따라 아, 입 벌려 받아먹었네

제비 둥지 제비새끼같이 받아먹었네

아시를 보고 생청붙이는 내게 빈 젖을 물려주던 그니가

이제는 북천(北天) 바다 갯내 같은 비린내를 풍기는 그니가

물 만 밥에 비린 것 한 토막 얹어 먹고 싶다 하시네

나 혼자 아, 아, 입 벌려 받아먹던

그 비린 것 한 토막

 

-시집 『초승밥』 2022년 『현대시학』

 

 


 

홍경나 시인

1961년 대구에서 출생. 2007년《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초승밥』(현대시학, 2022)이 있음.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수혜. 2022년 천강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