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돈형 시인 / 잠깐 흐림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2. 1. 05:00

이돈형 시인 / 잠깐 흐림

 

 

눈꺼풀을 풀자 쏟아진 날씨는

뻘을 맨발로 다녀간 당신의 강박증을 통과중이다

맛이 들수록 딱딱해지는

서너 개의 아침들을 풀어헤칠 때마다

당신의 검은 브래지어 끈은

나의 몇 번째 로그인을 엿보았을까?

 

길들여진 천장을 갈아 끼우면 비가 비친다

한꺼번에 쏟아진다, 로 당신은 어떤 치유를 원하지만

급하게 떠난 자에 대한 야유처럼 구름의 유두에서

종종 매듭의 실마리가 없는 발톱을 뽑아낸다

나는 사라지는 것들을 걸쳐 입었다

당신의 눈꺼풀도 나를 열어 놓은 채

당당한 걸음으로 조금 전 날씨를 기록하고 있다

 

물기에 가까운 유턴은 뜻밖의 호소였다

우울의 문턱을 넘어온 흐림과

당신의 재채기

자주 한잔의 물이

당신을 휘파람부는 일요일로 치켜세우며

휘어진 뻘의 낭만을 들이키고 있다

 

전원 off로 난청의 귀들은 따뜻해져

밝음에 긁힌 당신의 흔들림을 토닥인다

어느 귀들이 흐림을 읽어 낼 수 있을까?

먼저 만개하는 자정(自淨)의 오후

난간 위에서 당신의 검은 브래지어 끈을 풀어주자

눌린 자국에서 젖은 알들이 부화를 시작한다

 

 


 

 

이돈형 시인 / 간 천엽 한 접시 만원

 

 

'한우내장탕'이란 간판을 너무 끓여 흐물흐물해진 식당

한 접시 만 원짜리 간 천엽을 시켜놓고

첫 잔은 빈속에 딱이라고 도망간 애인처럼 털어 넣었다

 

간 천엽 한 접시

싱싱하다고 하면 어딘가 아플 것 같고

내 주제를 넘어서는 것 같아서

소갈머리 없이 바닥을 보인 잔에 술이나 채웠다

 

간 쓸개는 빼놓는 물건인줄 알았다

간 쓸개 붙은 놈은 제값 쳐줄 리 없었고

간 쓸개 다 빼놓고 달라붙어도 속아 넘어가는 일이 태반이었다

 

주인장은 요즘처럼 장사 안 되면 문 닫는 게 상책이라며

끓는 냄비 속에 고춧가루를 풀어댄다

내장에 소금을 덜 치댔는지 탕에서 속 끓이는 냄새가 났다

 

소가 넘어간 건 넘어간 거고

속아 넘어간 것도 넘어간 거니까

소주도 넘어가야 제 맛이라고 다시 털어 넣었다

 

천엽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소가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있다

어쩌자는 건지

나는 간 쓸개도 없고

간 천엽 한 접시 만원이면 되는데

되새김질할 수 없는 인간이어서 기름장 속의 소금만 찍고 있다

 

 


 

이돈형 시인

1968년 충남 보령 출생. 충남대학교 철학과 졸업. 2012년 《애지》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우리는 낄낄거리다가』(천녀의시작, 2017)와 『뒤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걷는사람, 2020)이 있음. 2018년 제9회 김만중문학상 수상. 제6회 애지작품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