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천양희 시인 / 뜻밖의 질문

파스칼바이런 2023. 2. 2. 05:00

천양희 시인 / 뜻밖의 질문

 

 

눈이 녹으면 그 흰 빛은 어디로 가나*

그가 질문을 던졌을 때

우리는 다만

그 질문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상상할 뿐

그 흰 빛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눈보다 더 눈부신 흰 빛이 있을까

얼마간 의문을 가져보다가

생각은 머릿속으로 하는 혼잣말 같고

날리는 눈발은

하염없이 잃어버리는 목소리 같아

 

눈이 쌓이고 쌓인 눈 위에

또 눈이 쌓이는 것을 보면서

나는 누구의 기억 속에 얼마나 쌓였을까

거듭 가파른 생각을 한다

어느덧

눈에 눈[雪]물이 차오른다

 

눈이 녹아도

그 흰빛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눈을 쓸면서 뒤늦게 받아들인다

 

저 흰 빛만큼 눈부시게

내 생각을 들어올린 구절은 없다

 

어떤 눈은 너로부터 무너지고

어떤 너는 눈처럼 쌓인다

 

눈이 와서 하는 일이란

나에게서 오점을 지워주는 일

 

백색이 모두인 눈의 세계에도

유백 설백 청백으로 나뉜다는 걸 알고 난 뒤

눈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뜻밖의 질문을 받을 때처럼 놀라서

눈길을 오래 걸어 본다

 

쌓이거나 녹거나 하는 것만큼

긴 문장이 있을까

 

돌아보니

어느 소설의 첫 문장같이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마침내

뜻밖의 질문이 완성되었다

 

*셰익스피어

 

계간 『청색종아』 2022년 봄호 발표

 

 


 

천양희(千良姬) 시인

1942년 부산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를 졸업, 1965년 박두진 추천 시 '정원(庭園) 한때'로 '현대문학'등단. 1983년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으로 작품활동 재개, 시집으로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 「사람 그리운 도시」 「하루치의 희망」 「마음의 수수밭」 「오래된 골목」 「너무 많은 입」 등이 있고, 짧은 소설 「하얀 달의 여신」, 산문집 「직소포에 들다」 등을 출간. 1996년 소월시문학상을, 1998년 현대문학상, 2005년 공초문학상을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