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예강 시인 / 꽃밭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2. 2. 05:00

김예강 시인 / 꽃밭

 

 

할머니 방에, 따끈한 아랫목에

 

열세 살, 내 딸아이 팬티 널려있다

간밤 할머니 손으로 조물조물한 팬티

방바닥에 꽃모종이라도 옮겨 심은 것일까

한 장, 두 장, 석 장, 넉 장, 바닥에 꽃이 피었다

모두 가지각색 무늬다

할머니의 방안엔

합죽이…, 할머니 얼굴이 왕초꽃

방안에 그득한 앉은꽃, 누운꽃

할머니꽃 아래에 내 새끼꽃

바닥이 간지럽겠다

아하, 저 꽃밭.

나팔꽃 넝쿨이 노구를, 얼굴을 간지르는 지

할머니는 꽃밭에 앉아 즐겁게 웃고

열었던 방문 닫으며 나도 화알짝

 

 


 

 

김예강 시인 / 식물성 사랑

 

 

나는 내가 한 개 잎인 것을 잊었다 잊은 지 오래 되었다 나는 흙에 나의 뿌리가 박혀 있는 것도 잊고 허공의 바람이 지나칠 때면 내 몸의 솜털을 흔들어 바람에게로 길을 물었다

 

나는 잎인 것도 잊고 수컷과 결혼하고 싶다고 하고 수컷 앞에서 한 잎의 눈으로 더없이 맑은 웃음을 낳았다

 

흐느끼는 여자,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 여자, 울음을 밥처럼 삼키는 여자, 울먹이는 여자, 울부짖는 여자… 울음을 애기처럼 달래는 여자의 연애를 떠올렸다 나는 잎이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잊고

 

잎뿐인 것도 잊고 저녁이면 암각화처럼 바람의 무늬를 새기고 잎맥들의 살을 팠다 내가 잎인 것도 잊고 잎뿐인 것도 잊고

 

 


 

김예강 시인

1961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부산교육대학교 및 同 대학원 졸업. 2005년《시와 사상》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고양이의 잠』과 『오늘의 마음』이 있음. 웹진 『시인광장』과 계간 『시와 사상』 편집장 역임. 현재 계간 『시와 사상』 부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