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정희성 시인 / 민지의 꽃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2. 3. 05:00

정희성 시인 / 민지의 꽃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 시인 / 11 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11 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지금은 어디에 머물렀을까

어느덧 혼자 있을 준비를 하는

시간은 저만치 우두커니 서 있네

그대와 함께한 빛나던 순간

가슴에 아련히 되살아나는

11 월은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

빛 고운 사랑의 추억이 나부끼네

 

*아메리카 원주민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 부른다

 

-시집 『돌아다보면 문득』 창비. 2008

 

 


 

정희성 시인

1945년 경남 창원에서 출생. 서울대 국문과 졸업 및 동 대학원 졸업. 197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변신〉이 당선되어 등단. 1972년 숭문고등학교 교사. 시집으로 『답청(踏靑)』 『저문 강에 삽을 씻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시를 찾아서』 『돌아다보면 문득』 등과 그 밖에 『한국현대시의 이해』(共著) 등이 있음. 1981년 제1회 김수영문학상과 1997년 시와시학상, 불교문학상, 만해문학상, 아름다운 작가상,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2014 제5회 구상문학상 수상. 한국작가회의 이사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