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인평 시인 / 입관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 05:00

이인평 시인 / 입관

어머니는 더 이상 말씀이 없으셨다

마지막 자취를 감추는 시간

굳은 표정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은 얼굴을 마주하고도

일부러 입을 다물어버린 것처럼

고요조차 황망했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서로 우애 있게 살기 바란다고 하실 뜻도

미처 전할 사이도 없이

무슨 말씀이 들릴 듯 말 듯 할 때

관뚜껑이 닫혔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없어진 건 아니었다

어머니는 지금 관 속에서 흙 속에서

하실 말씀을 침묵으로 다 하실 것이었다

나, 여기 있다고, 이미

죽기 전해 다 말하지 않았느냐고

그래도 아직 못 알아듣겠느냐고

관 속에서 들려왔다

돌아가시고 나서야 더 크게 들리는 말씀

관을 뚫고, 무덤을 뚫고 들려오는

어머니의 크신 말씀

세월이 흘러도 내 안에 사는

죽음보다 깊고 황망한 말씀에 뼈가 울린다

​​

계간 『서정시학』 2023년 가을호 발표

 

 


 

 

이인평 시인 / 모네의 수련

 

생명은 물에서 태어나지

원래 있었던 것처럼

 

너는 눈물 속에서 꽃을 피웠지

사랑이라고 말했던 건 모두

눈물이었지

 

연못에서 새벽안개가 피어날 때

너는 눈물에 씻긴

한 송이 수련으로 피어났지

 

분홍빛 행복이 물에 어려

물속 어딘가에 숨겨둔 비밀인 양

눈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출렁이지 않았지

아주 잠깐이면 생은 끝이라고

안개가 말했지만

 

사랑은 끝이 없을 거라고

가슴에 고인 눈물의 연못 속에서

마냥 피어날 거라고

고요를 흔들며 버들이 말했지

 

사랑에서 너는 늘 피어나지

그것이 미움일지라도

 

보면 볼수록 모네의 화폭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서

날마다 너는 수련으로 피어나서

영원히 죽지 않을 거야

원래 거기에 있었던 것처럼

​​

계간 『서정시학』 2019년 여름호 발표

 

 


 

 

이인평 시인 / 소금의 말

 

네 손으로 내 몸을 한 움큼

집는 순간

창백한 내 피부에서

해풍에 말려진 쓰린 결정체의

짠 빛을 볼 것이다

 

삶은 매섭게 짠 것이라고

저물게 깨닫는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바다에 닿는 긴 아픔을

깨물게 되리라

 

너는 원래 소금이었다

내 짠 숨결이

흙으로 빚은 네 몸을 일으킬 때

네 눈엔 눈물이 흘렀고

그 눈물의 짠맛이

네 유혹의 단맛을 다스렸다

 

보라, 파도의 씨눈들이 밟히는

네 영혼의 길에서

하얀 내 유골의 잔해가 빛난다

 

나를 쥐었다 놓는 그 시간에

한 주먹 내 몸이 흩어지면서

피안으로 녹아 흐르는,

절여진 네 목숨의 긴 호흡을

만나리라

 

2000년 《평화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이인평 시인

1993년 월간 《조선문학》 신인상에 〈여행자〉 외 4편이 2000년 《평화신문》 신춘문예에 〈소금의 말〉 당선. 시집으로 『길에 쌓이는 시간들』, 『가난한 사랑』, 『명인별곡』, 『후안 디에고의 노래』 1, 2집 『소금의 말』과 등. <조선문학작품상>, <한국가톨릭문학상>, 장관 표창 수상. 녹색문학상 운영위원 및 심사위원을 역임. 현재 국제펜한국본부 이사, 한국문인협회 숲문화위원, 한국시인협회 상임위원, 한국가톨릭문인협회 부이사장, 시사랑문화인협의회 감사, 한국인물전기학회 이사, 문학의집서울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