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오명선 시인 / 은행나무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 05:00

오명선 시인 / 은행나무

 

 

잎잎이 기록된 푸른 햇살이여

이제 안녕!

 

펄럭이던 해와 바람의

 

일기장에서 삭제되었다

 

낡고 지루한 사랑과의 이별은

조이던 스카프를 풀어낸 헐렁한 목이다

파장한 장터의 풍경처럼

내 손금을 벗어난 전생처럼

슬하는 오히려 풍요롭다

 

파산한 내 집을 구경하는 나는

낯선 관객이다

 

 


 

 

오명선 시인 / 우기의 배경

 

 

먹구름이 무거운 이유는

산란되지 못한 빛의 무게 때문이다

저기압의 행로를 결정짓는 건 오로지 바람뿐,

   

빌딩의 긴 그림자를 건너온 구름들

착지할 곳을 찾고 있다

바람에 밀려 流産이 되어버린 하늘이

조각조각 흘러내린다

 

나는 과연,

수직의 통증을 곡선으로 견딜 수 있을까

수많은 낙뢰를 삼키며 살아온 피뢰침과 평행일 수 있을까

꺾인 날개를 쓰다듬으며

저물어가는 계절을 둥글게 끌어안아야 한다

 

빗방울이 생각을 밟아가는 동안

한 다발의 먹구름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렇게,

또 다시 우기가 무릎까지 차오르고

입을 꽉 다문 내 침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우르르 쾅쾅,

어둠의 배경 위로 떠오르는 풍경이

네 혀처럼 붉다

 

계간 『시와 사람』 2011년 가을호 발표

 

 


 

오명선 시인

1965년 부산에서 출생. 부산여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9년 《詩로 여는 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오후를 견디는 법』이 있음. 2012년 인천문화재단문화예술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