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명선 시인 / 은행나무 외 1편
오명선 시인 / 은행나무
잎잎이 기록된 푸른 햇살이여 이제 안녕!
펄럭이던 해와 바람의
일기장에서 삭제되었다
낡고 지루한 사랑과의 이별은 조이던 스카프를 풀어낸 헐렁한 목이다 파장한 장터의 풍경처럼 내 손금을 벗어난 전생처럼 슬하는 오히려 풍요롭다
파산한 내 집을 구경하는 나는 낯선 관객이다
오명선 시인 / 우기의 배경
먹구름이 무거운 이유는 산란되지 못한 빛의 무게 때문이다 저기압의 행로를 결정짓는 건 오로지 바람뿐,
빌딩의 긴 그림자를 건너온 구름들 착지할 곳을 찾고 있다 바람에 밀려 流産이 되어버린 하늘이 조각조각 흘러내린다
나는 과연, 수직의 통증을 곡선으로 견딜 수 있을까 수많은 낙뢰를 삼키며 살아온 피뢰침과 평행일 수 있을까 꺾인 날개를 쓰다듬으며 저물어가는 계절을 둥글게 끌어안아야 한다
빗방울이 생각을 밟아가는 동안 한 다발의 먹구름이 현관문을 밀고 들어선다
그렇게, 또 다시 우기가 무릎까지 차오르고 입을 꽉 다문 내 침묵이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우르르 쾅쾅, 어둠의 배경 위로 떠오르는 풍경이 네 혀처럼 붉다
계간 『시와 사람』 2011년 가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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