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경호 시인(서산) / 독서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8. 05:00

이경호 시인(서산) / 독서

 

 

시장(市場)은

누덕누덕한 사기(史記) 한 권이다

 

함석과 슬레이트 판자로 만든

표지는 아주 낡았다

 

책갈피처럼 나 넘보지만

동부시장이라고 쓴

큼지막한 제목만 읽어낼 뿐이다

 

생의 동쪽 찾아가는 유목민들이

아기가 크는 동안 잠시 눌러앉은 푸른 초원

 

어느새

눈 맑은 부족이야기를 읽고 있다

한 여인이 건넨 덤 때문에

나도 푸른 초원편의 한 페이지가 되었다

 

 


 

 

이경호 시인(서산) / 암소 한 마리

 

 

암소 한 마리, 라는 고깃집에서

암소가 묻힌 봉분들이 나온다.

 

스스로 무덤이 되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물고 들어간다.

 

 


 

 

이경호 시인(서산) / 말뚝 유전

 

 

그가 면접을 치르고

말뚝과 밥그릇 받던 날

주인얼굴엔 환하게 초승달이 떴다

초승달이 상현달 되었다가

보름달 그믐달을 반복하는 동안

그는 직함 하나 갖게 되었다

멍석전문가 명함으로

멍석을 짜고 다듬는 일을 하였다

하루에 한 장 발자국멍석 짜고 나면

하늘에는 별이 떴다

달뜨면 멍석은 빵처럼 빛났고

아침마다 물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그때마다 꼬리를 흔들거나

배 드러낼 줄 아는 눈치 키웠는데

횟배 앓고 있었을 것이다

오랜 가계의 병력으로 속이 메스꺼워

빵을 몰래 파먹었다가 들통이 난 날

주인이 초승달전화기를 들었고

작은 빵에도 꼬리치는

강아지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이경호 시인(서산)

충청남도 서산 출생. 1999년 《작가마당》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비탈』이 있음. 한국작가회의충남지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