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경숙 시인 / 해리성 기억상실증 외 1편
황경숙 시인 / 해리성 기억상실증
숨은 샘을 찾아 늦가을 천은사(泉隱寺)를 헤맸다 소지(燒紙)의 재로 용(龍)의 눈을 마지막으로 닦아주는 일곱 번째 이렛날에야 마른 계곡 안쪽에서 아쿠아마린 빛 소(沼)를 찾았다 측백나무 잔뿌리와 단단한 흙을 비집고 막 걸어 나온 듯 스러졌다 돋아나고 돋았다 스러지는 여러 개의 크고 작은 입을 감아 돌리는,
소용돌이치는 발아래 하늘 속으로 빨려 들면서 아버지 목탁소리를 들었다
내 기억이 오리온자리에서 왼쪽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고 차트에 씌였다 넘어져 깨진 무릎에 옻 단풍이 들었지만 다행히 밝은 별 하나는 손에 꼭 쥐었으므로, 놓친 여섯 개의 별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처방전이 천정에 붙여졌다 셀 수 없는 많은 말들이 파장을 일으키며 입 안을 빙빙 잡아 도는 날들이 왔다 도마뱀꼬리처럼 끊어버린 내 시간 속에는 새로운 꼬리표가 생겨나지 않았다
기억상실증이란 퍼내지 못한 말들이 까맣게 물들어가는 먹감 빛 간절함, 그 구겨진 말의 발들이 어둠 밖으로 달려 나오며 모서리에 홀려 구르기도 하고 뿌리 뽑힌 측백나무가 움켜쥔 허공에 때 이른 용설란을 피워낼 때까지의 큰 보폭
가까운 타인 같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쫓겨 다니지 않아야 한다고 소리치며 바람을 만졌으나 흩어지며 사라진다 어긋나지 않으려면 당신을 비켜서지 않아야 한다
버리지 못한 말들이 오래 숨겨져 있던 물 속으로 가라앉을 때 갓 태어난 아이처럼 울어야 하는 많은 날들은 앞에서 뒤로 오는 것이다
황경숙 시인 / 프로타쥬
눈꺼풀이 내려지고 푸른 동공이 닫히기 전에 나는 네 얼굴에서 데스마스크를 뜬다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고 블루 빛 염색을 하고 손톱 발톱에 검은색 매니큐어로 날개를 그리고 너를 따라 날아오르는 내 얼굴 아직 가면은 아니다
내일 아니 오늘 이미 자란 너의 아이를 낳고 코르셋 끈을 조이면 허리가 잘록해지므로 나는 다시 태생의 물병자리에 꽂혀 물구나무선 채 너를 만날 수 있다
짧지만 여전히 날 선 말들로 내 물음에 대답하는 너는 모래시계 속의 블랙홀에 갇혔다 빠져나오기를 반복한다
얼굴에 흰 종이를 대고 연필로 긁고 긁으면 꿈속에서 접은 종이인형처럼 뻔뻔한 네 윤곽은 살아날 듯 꿈틀거린다
너와 내가 닮은 유일한 언어가 뒷모습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과거와 현재 사이에 너라는 미래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의 천극(川劇)이 거꾸로 흐르면 내 시(詩)의 변검(變瞼)*은 언제 네 얼굴을 떼 낼지 모른다
* 중국 쓰촨성(四川城) 고유의 경극으로서 일종의 가면놀이. 천극(川劇)이라고도 함.
-<시인시각> 2010 봄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