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서연 시인 / 둥지 외 1편
강서연 시인 / 둥지
거실 소파가 서식지였던 남편은 어느 날 홀연히 베란다 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세월이 뒤따라갔지만 그가 날아간 흔적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 이유로 창문은 늘 열려 있었고
약병은 번번이 쓰러졌다 슬어놓은 아이들은 나무 그림자가 안고 품어서 그런지 쉽게 휘어지는 날개를 지녔다 아이들은 숟가락을 허공에 찔러놓고 자주 뒤꿈치를 들었다 하루에도 수십 번 깃을 세워 스스로 털을 밀어내며 사춘기를 견뎠다 얘들아, 하늘을 보렴 새를 놓친 것은 너희들 잘못이 아니란다
나뭇가지도 함부로 세를 놓지 않는 계절 미루나무 그림자가 둥지를 들고 들어와 소파에 오래 놀다 가는 날이면 철새 한 마리 베란다 주위를 돌고, 돌고, 돌다 갔다 곧 겨울이 올 것 같다
강서연 시인 / 길에서 주웠다
섬진강변을 따라 걷는 산책길 콘크리트 바닥에 떨어진 고라니 발자국을 주웠다 구슬은 빠져나가고 틀만 남은 브로치 강과 들녘의 풍경을 여미고 있는 이것은 길이라는 순한 눈동자의 흔적이다 질주를 탁본한 천연 주얼리이다 바람이 몸을 깎아 브로치 빈 틀에 넣어보는 오후 소나기라도 한차례 내리고 나면 머무른 고라니 발자국에도 넘칠 듯 그렁거리는 에메랄드빛 보석 알알이 박혀 들겠다 세상의 길이란 길은 모두 둥근 기울기로 흘러 개망초도 강아지풀도 둥그런 발등으로 구례의 서쪽 끝까지 걸어가겠다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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