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장한라 시인 / 말을 다독이다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3. 05:00

장한라 시인 / 말을 다독이다

 

 

순백의 하얀 말등

검은 선 덧입혀 얼룩말을 그린다

완만한 오름에 꼬리를 내려놓은 말

새별에 당신의 말을 풀어놓고

서로에게 말을 건다

그도 나도 말이 없다

검은 선들 사이 얼룩말 한 마리

 

말들이 달리지 않는다

 

가장 솔직한 감정을 지웠군

말로 말하지 못하는, 무심한 표정

작고 하얀 말의 소리 없는 외침

무슨 말인지 다시 말해 줄 수 있나요

위로되지 않는 말들이 말을 풀어낸다

공간을 통해 몸짓으로

삶의 일상과 말의 무게를 지탱할 또 다른 말이 필요해

끝없는 초원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을

말들이 달아난 곳에

초록 짙은 말들이 연을 맺는다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상상인, 2022) 수록

 

 


 

 

장한라 시인 / 말들의 휴가

 

 

들뜬 마음 눌러두고

함께 오래 마주 봐야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고생했다

숨 가쁘게 달려온 나날들 핥아주며

느긋하게 풍광을 바라볼 수 있다는 것

뒷발굽도 느껴봐야지

 

마방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안개와

눈 감고도 훤한

부대오름 우진제비오름 길을 지우며

오늘은 조천 바다로

내일은 표선 바다로 미끄러져야지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고

간섭 없는 곳에서

들숨 날숨 껌벅껌벅 눈썹으로 헤아리다

하품 길게 하고

낮잠이란 게 어떤 것인지

별이 뜰 때까지 늘어져 맛봐야지

 

시집 『철원이, 그 시정마』(상상인, 2022) 수록

 

 


 

장한라 시인

부산에서 출생. 1985년 김남조 시인의 사사를 받으며 시 입문. 2015년 첫 시집 『즐거운 선택』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철원이, 그 시정마』 외 3권 상재. 201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예진흥기금 수혜, 2019년 부산펜문학상 작가상 수상. 『부산펜문학』 편집장,  시전문지 『시와편견』 편집장. 도서출판 『시와실천』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