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손음 시인 / 별이 빛나는 낮에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18. 05:00

손음 시인 / 별이 빛나는 낮에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겠구나 말하면 희망이 화를 내겠지

이제 겨우 살 수 있겠구나 말하면 절망이 화를 내겠지

햇볕이 앙상하게 부는 날 검정 우산을 쓰고

나는 해변으로 갔지

대낮에도 반짝반짝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

대낮에도 불을 켠 기차가

미친 듯이 지나가는 곳이지

나는 매일 우산을 쓰고 해변으로 갔지

아무라도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비를 쓰고 구름을 쓰고

누명을 쓰고

 

파도가 최선을 다해 밀어 올린 해변의 것들

피붙이같이 엉켜 있네

나도 그 곁에 쪼그리고 살면 안 되나

슬픈 일은 혼자 앓아야 하는데도

모래와 파도와 죽은 갈매기에게

두근두근

내 얘기를 털어놓기에도 하루가 짧았지

내일도 해변으로 갔지 모레도 해변으로 갔지 영원히 갔지

나는 날마다 그곳에서 무엇이든 쓰고 썼지

누명이든 고통이든 쓸쓸함이든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손음 시인 / 꽃의 장난

 

 

꽃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들간들 논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간들간들 논다

바람과 햇볕이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격렬하게 꽃과 놀다 헤어지는 일

꽃은 사내처럼 가는 것이고 사내처럼 오는 것이다

나는 여배우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흥청망청 꽃을 운다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가는 세월을 구경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해졌다

이별은 허술한 요리사가 만드는 싸구려 음식 같은 것

 

오늘은 봄이고 나는 꽃을 만나러 간다

꽃을 헤어지러 간다

울면서도 가고 자빠지면서도 간다

내가 어쩌다 걱정한 꽃이

우리가 어쩌다 미워한 꽃이 그곳에 산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구두를 벗기도 전에

내 발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꽃의 자살을 멀쩡히 구경한다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손음(孫音) 시인

1964년 경남 고성에서 출생. 본명 손순미. 1997년《부산일보》신춘문예와 《현대시학》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 『칸나의 저녁』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연구서 『전봉건 시의 미의식 연구』가 있음. 제11회 부산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