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음 시인 / 별이 빛나는 낮에 외 1편
손음 시인 / 별이 빛나는 낮에
이제 더 이상 살 수 없겠구나 말하면 희망이 화를 내겠지 이제 겨우 살 수 있겠구나 말하면 절망이 화를 내겠지 햇볕이 앙상하게 부는 날 검정 우산을 쓰고 나는 해변으로 갔지 대낮에도 반짝반짝 밤하늘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 대낮에도 불을 켠 기차가 미친 듯이 지나가는 곳이지 나는 매일 우산을 쓰고 해변으로 갔지 아무라도 날 알아볼 수 있도록 비를 쓰고 구름을 쓰고 누명을 쓰고
파도가 최선을 다해 밀어 올린 해변의 것들 피붙이같이 엉켜 있네 나도 그 곁에 쪼그리고 살면 안 되나 슬픈 일은 혼자 앓아야 하는데도 모래와 파도와 죽은 갈매기에게 두근두근 내 얘기를 털어놓기에도 하루가 짧았지 내일도 해변으로 갔지 모레도 해변으로 갔지 영원히 갔지 나는 날마다 그곳에서 무엇이든 쓰고 썼지 누명이든 고통이든 쓸쓸함이든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손음 시인 / 꽃의 장난
꽃은 나뭇가지에 앉아 간들간들 논다 손가락 끝으로 발가락 끝으로 간들간들 논다 바람과 햇볕이 사귀는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계절이 바뀌는 것은 격렬하게 꽃과 놀다 헤어지는 일 꽃은 사내처럼 가는 것이고 사내처럼 오는 것이다 나는 여배우처럼 붉은 립스틱을 바르고 흥청망청 꽃을 운다
꽃나무 아래 서서 지나가는 세월을 구경한다 행방이 묘연해진 사람들의 이름이 통증을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해졌을 때 이별을 만들었다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졌을 때 잔인해졌다 이별은 허술한 요리사가 만드는 싸구려 음식 같은 것
오늘은 봄이고 나는 꽃을 만나러 간다 꽃을 헤어지러 간다 울면서도 가고 자빠지면서도 간다 내가 어쩌다 걱정한 꽃이 우리가 어쩌다 미워한 꽃이 그곳에 산다
내가 도착하기도 전에 내가 구두를 벗기도 전에 내 발이 뜨거워지기도 전에 스스로에게 총구를 겨눈 꽃의 자살을 멀쩡히 구경한다
-시집 <누가 밤의 머릿결을 빗질하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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