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기혁 시인 / 개나리벽지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23. 05:00

기혁 시인 / 개나리벽지

 

 

잉크 대신 피를 넣은 만년필을 내려놓는다

말라붙은 여름만 남은 오탈자 노트

 

모기와 파리, 권태와 배달쿠폰

까닭 모를 증오와 천사도 시들어 있었다

 

겨울이 가면 절필이다 사방의 냉기를 찢어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싶다

 

사람을 사랑했던 들짐승처럼

손인사에 무너지던 아지랑이처럼

개나리를 독자로 모시고 제 것을 핥아보고 싶다

 

불면이 기거하던 좁고 네모난 가슴 밖까지

입에서 입으로

봄날을 도배하면서

상온의 원고뭉치를 부려 놓고

 

모음으로 번질 꽃잎들을 실언(失言) 할 것이다

 

 


 

 

기혁 시인 / 떨어진 면적의 먼지를 털며

 

 

생활이 바뀌면 피부가 아프다

 

환절기처럼 얇고 긴 겉옷 속에서

타인의 손을 탄 한 시절이

부풀어 오른다

 

열이 난다는 건

어딘가 높낮이가 생겼다는 증거

이별은

서로 다른 기후대를 만들고 각자 살아갈

짐승을 불러 모은다

꼬리를 치켜세우고 코를 킁킁거리며

 

한때는 인적이라 불리던 체온의

이동 경로를 상상하는 짐승

 

피부에도 마음이 있을까

무리에서 떨어진 마음은

어떤 야성을 키울까

 

그리운 사람을 만나면

기분과 날씨가 먼저 살에 맺힌다

피부와 피부가 맞닿을 때마다

 

생활의 등고선을 따라 이어지던 울음도

소매를 걷고서 딴청을 피운다

 

핏줄과 인연의 가장자리에서 한평생

피부만 문지르던

생식의 지리

 

마음은 길을 잃은 적이 없다

 

마지막 순간까지

생애의 한 면적을 걸치려 한다

 

 


 

기혁 시인

1979년 경남 진주에서 출생.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졸업.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2010년 계간 《시인세계》를 통해 등단. 시집 <소피아 로렌의 시간> <모스크바예술극장의 기립박수>. 2014년 제33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