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미애 시인 / 바람의 습성 외 1편
신미애 시인 / 바람의 습성
여과지 없는 바람의 감정, 시선이 닿는 순간 점화된다 예열은 생략되고 숙성도 짧다 풍부한 표정에 갖은 형용사가 부풀고 가끔 예정된 행로에서 방향을 수정한다
지친 마음에 미풍을 불러오고 싫증난 마음엔 돌풍을 불러온다 잠시 머무를 뿐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지 않는 바람들 잠깐의 후회가 깃들어도 망각은 천성이라 컴퓨터 포맷하듯 곧 날씨는 정리된다
엔터 하나로 사라지는 과거 해질 무렵의 외로움 같은 혼자의 시간, 바람은 참을 수 없는 허기를 채우려고 인터넷을 뒤진다
바람의 시선이 분주해진다 또 어디선가 지루한 바람이 불어온다
신미애 시인 / 스테이크 결혼식
늘어선 화환의 호위를 받으며 말쑥한 양복을 따라간다 신부와의 거리는 값으로 계산되고 악수를 나누면 일차 임무는 끝낸 것, 은은하게 빛을 쏟아내는 샹들리에와 꽃으로 치장한 무대, 하얀 냅킨, 은빛 포크와 나이프가 정갈한 원탁 정중한 모자와 핸드백이 둘러앉는다 어색한 분위기를 지우려 앞과 옆이 가벼운 목례를 교환한다 교과서 목차 같은 의식엔 복제가 무성하다 비슷비슷한 언어와 무감동의 설교가 흘러내린다 지루한 표정이 떠다닌다
예상대로 주례는 진부하고 신부는 지나치게 화사하다 식순에 맞춰 나비넥타이가 들고 온 스테이크, 이 고기는 어디서 왔을까 질긴 고기를 열심히 씹는다 갈색소스는 시큼하다 혀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식사, 사회자가 건배를 외치자 낯선 잔을 부딪칠 때 어설픈 웃음이 잠시 머문다 웃으며 불편을 삼킨다 하객들은 신랑 신부의 무게를 혓바닥에 올려놓는다 접시를 비우기 전 축하의 장면들, 하객의 웃음소리가 벌써 삭제되었다 포크에 매달린 고기를 마저 밀어 넣고 커피를 마신다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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